‘당구의 신’도 운명은 어쩌지 못했다
  • 제희원 인턴기자 ()
  • 승인 2015.03.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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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 월드컵 챔피언 김경률, 부모 아파트에서 추락사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당구 월드컵에서 우승한 ‘당구의 신’ 김경률 선수(35)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22일 오후 3시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부모집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숨졌다. 김씨를 목격한 주민은 “‘빨래처럼’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이날은 김경률 선수의 35번째 생일 전날이었다.

국내외 당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김경률 선수는 당구계의 김연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16세에 입문했지만, 5년 만에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고 국내 아마추어 당구대회를 제패했다. 순수 국내파 선수로서 프로 선수로 등록한 지 불과 2년 만에 국내 랭킹 1위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 무대로 진출했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과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특히 2010년에는 당구 ‘4대 천왕’으로 불리는 코드롱, 야스퍼스, 산체스, 토르비에른 블롬달을 제압하며 한국 선수 최초로 터키 월드컵 정상에 올라 돌풍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2011년엔 세계 랭킹 2위에 오르며 ‘당구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12년 아시아캐롬선수권 3쿠션에서 우승하고 환호하는 김경률 선수. ⓒ 대한당구연맹 제공
2011년 세계 랭킹 2위 올라

김경률 선수는 설 명절을 맞아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부모 아파트를 찾았다. 점심을 먹고 어린 자녀들과 함께 생일 케이크 촛불을 불었다. 부인과 딸은 먼저 서울 자택으로 돌아갔고, 김 선수는 다섯 살배기 큰아들과 남았다. 김 선수의 누나가 다용도실 세탁기 위쪽 선반 정리를 부탁했다. 모친과 김 선수의 아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김 선수는 아파트 20층의 베란다에서 아파트 화단 쪽으로 떨어졌다. 

경찰은 수사 초기 베란다 난간의 높이가 1.2m 정도라서 184cm의 장신인 김 선수가 직접 뛰어내리지 않는 한 추락할 수 없다고 봤다. 자살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내부 출입 흔적이 없는 상태에서 목격자 없이 벌어진 일이고 타살 혐의점이 없기 때문에 자살로 추정된다고 했다. 경찰과 언론 등은 “김 선수의 최근 성적이 부진했고 사업상 어려움도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한 것 아니냐”고 추측했다.

그러나 김 선수의 유족과 지인들은 김씨가 자살할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 선수의 성적은 최근 몇 년간 국내 랭킹 4~5위권에서 7~8위권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당구라는 종목 특성상 랭킹 10위권 내의 변동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성적 부진이 자살의 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대한당구연맹 측의 설명이다. 김 선수는 사망하기 2주전쯤 세계 당구대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이완 시모니스’와 스폰서 계약을 맺었고 수입도 안정적이었다. 사업 과정에서 약간의 부채가 있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유족과 대한당구연맹 측 주장이다.

유가족은 사고 직후 경찰이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채 자살로 추정한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사건 당일 고양경찰서에 접수된 변사 사건만 4건이었다. 이에 경찰이 꼼꼼하게 사건 현장을 조사하지 않은 채 자살로 잠정 결론 내린 게 아니냐고 유족 측은 항의한다. 유족 측은 또 언론에 김경률 선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보도된 이후에야 경찰이 장례식장을 찾아와 재수사 의사를 내비쳤다고 말했다.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의 고 김경률 선수 빈소 ⓒ 대한당구연맹 제공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아파트 사고 현장 ⓒ 시사저널 임준선
사고 초기 “자살이냐 실족사냐” 논란

김 선수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김 선수의 어머니였다. 김 선수는 다용도실 청소를 하던 중에 예전부터 틀어져 있던 방충망 틀을 흔들면서 맞추려고 했고, 이를 본 김 선수의 모친은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 손자와 함께 낮잠을 잤다. 김 선수가 추락한 것을 인지하지 못한 모친은 아들이 잠깐 외출한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김 선수가 추락한 아파트 높이는 20층으로 맨 위층이었다. 베란다 바닥에는 놀이방 매트가 깔려 있어서 키가 큰 김 선수에게 베란다 난간은 허리보다 아래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유족은 설명했다. 기자가 사고 현장의 화단에서 올려다본 20층 베란다 방충망은 실제로 상당히 틀어져 있었다. 김 선수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방충망 수리를 하기 어려워 자신이 직접 방충망 틀을 분리하려다가 사고를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김 선수는 다음 날 동료 선수들과 저녁 약속도 잡아놓은 상태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김 선수가 5세 아들과 2세 딸, 임신 5개월의 아내를 두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고양경찰서 관계자는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 다음 추가로 현장조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내외 당구 팬들은 김경률 선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팬들은 세계 챔피언답지 않게 겸손하며 소탈하고 호탕한 웃음을 지닌 사람으로 김 선수를 기억하고 있다. 한국 당구의 세계 무대 진출 선구자로 평가되는 김경률 선수의 유골은 2월26일 강화도에 있는 한 추모공원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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