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日 왕실의 ‘마이웨이’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5.03.0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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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히토 왕세자,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에 제동…극우주의자들과 주류 언론 ‘못 들은 척’

2월23일 55번째 생일을 맞은 일본의 나루히토 왕세자는 관저인 동궁어소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지난 1년간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위로의 말로 인사를 시작했다. 기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과거사에 관한 발언이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올해가 전후 70년을 맞는 해라며 세계 각국과 우호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전후 태생이라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겸허하게 과거를 되돌아보고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부친인 아키히토 일왕으로부터 전쟁에 대해 직접 들었고, 그 역시 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왕실은 아베 정부에 위기감을 갖고 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길’에 관심이 많다. “길은 미지의 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는 귀중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며 ‘길’로 파생되는 문제 등을 공부했다. 일본 내에서는 가쿠슈인 대학을 다녔다. 그동안 일본 왕실에서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것이 대세였지만 나루히토 왕세자는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고 가쿠슈인 대학원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1983~85년 옥스퍼드 대학 머튼 대학에 유학하며 템스 강의 수운사에 대해 연구했고, 1988년 가쿠슈인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박사 과정을 마쳤다. 영국 유학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유학 이후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는 성격을 갖게 됐다. 일본 내에서만 머무르며 형성된 닫힌 세계관도 유학을 하며 활짝 열렸다.

2014년 6월21일 스위스를 방문한 나루히토 왕세자가 일본-스위스 국교 수립 150주년을 기념하는 표지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EPA 연합
일본의 일간지는 보통 한 건 이상씩 일왕 부부의 동정을 싣는다. 궁내청은 일본에서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기자들이 왕족을 직접 취재할 수는 없지만 대신 궁내청 장관이나 동궁 대부(왕세자 담당)가 기자회견을 정기적으로 한다. 일왕이나 왕세자는 1년에 한 번, 자신의 생일 때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을 한다.

이처럼 귀한 자리에서 역사 인식 발언이 나왔으니 세계가 주목했다. 다 장성한 왕세자의 발언인만큼 사실상 왕실의 공식적인 발언과도 같았다. 로이터는 “아베 정부는 과거에 대한 역사 인식이 잘못됐으며 일본의 인상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과거사를 수정하려 하지만 미국의 학자들은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기사에 ‘왕세자, 전쟁에서 일본의 행위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례적인 발언’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매체는 “민족주의자들이 역사적 범죄를 축소하려고 모색하는 논의에 대해 쐐기를 박는 듯한 발언”이라고 평가하며 “왕세자의 온화하면서도 철저한 의사 표명은 종군 위안부 문제 등을 중요시하지 않는 우익들의 중심에 있는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도했다.

아베 정부의 행보에 왕세자만 비판적인 게 아니다. 아키히토 일왕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왕 부부는 아베 정권의 우경화 움직임에 상당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궁내청을 중심으로 확산돼 있다. 실제로 2013년 80회 생일을 맞은 아키히토 일왕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후 연합군의 점령 아래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통해 오늘날의 일본을 만들었다. 황폐한 국토를 재건하며 개선해나가는 데 당시 지일파 미국인들의 협력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시 개헌을 언급하며 폭주하던 일본의 우익들은 평화헌법 개정 이유 중 하나로 ‘미국의 손에 좌지우지된 헌법’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런데 일왕이 직접 나서 ‘평화와 민주주의는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라고 평가했고, 여기에 지일파 미국인의 협력까지 언급하면서 우익들의 행보를 견제하는 발언으로 해석됐다. 일왕 부부는 그동안 헌법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한두 마디 정도 던질 뿐이었다. 그런데 아베 정부가 출범하고 개헌 움직임이 본격화한 후 나온 이번 발언은 왕세자의 속내를 드물게 구체적으로 털어놓은 사건이었다.

일왕 부부 발언 외면하는 일본 언론들

하지만 아베 총리와 우파 세력은 일왕의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의원 시절 아베 총리가 회장을 맡았던 신도 정치연맹을 비롯한 우파 집단은 일왕을 다시 국가원수로 받들 것을 공언하며 일왕 중심의 제정 일치 국가 부활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런데 막상 일왕이 호헌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언급하자 그 존재를 무시하고 왕실을 고립시키고 있다.

심지어 아베 총리 주변에서는 일왕에 대한 비판 발언까지 튀어나왔다. 교육재생실행회의 위원을 맡는 등 아베 총리의 브레인으로 알려진 헌법학자 야기 히데쓰쿠는 지난해 극우 성향 월간지인 ‘정론’ 5월호에서 ‘헌법을 둘러싼 천황의 발언에 위화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랬다. ‘왕실은 아베 정부를 비판하지 말라.’

이런 왕실과 정부의 엇박자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왕실의 평화 행보는 왕족 개개인의 생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왕실의 이해관계도 달려 있다. 전후 일왕 제도의 탄생 자체가 평화헌법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평화헌법을 만드는 대신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을 면제해줬고 일왕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용인했다. 아베 정부가 평화헌법을 흔들면 흔들수록 일왕 체제 역시 그 근간이 흔들리게 되는 형상이다.

반면 우경화 행보를 강화해나가는 아베 정부는 지금처럼 왕실이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할 것이라는 게 일본 정가의 중론이다. 지금 시점에서 일왕을 포함한 왕실의 정치적 가치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만에 하나 왕실이 자기네 뜻에 따라 우경화 발언에 동참해준다면 “천황의 말씀을 들어라”고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 그럴 가능성은 매우 미미하니 무시할 따름이다. 일왕이 앞서 행한 평화헌법에 대한 소신 발언을 일본 국내 언론이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도 일본 정부에는 도움이 된다. 지난해 10월 미치코 왕비 역시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평화를 지향하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경쟁 또는 고통의 싹을 근절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발언했지만 대다수 미디어가 비중 있게 취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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