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살생부’ 오른 순간 탕·탕·탕·탕!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3.11 16: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적 넴초프 괴한 총격에 사망…러시아 정국 혼돈 속으로

여섯 발의 총성이 러시아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2월27일 밤 11시30분,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는 여자친구와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거처인 크렘린궁 담장에서 불과 200m 떨어진 다리 위를 건널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흰색 포드 차량에서 괴한 두 명이 나와 넴초프의 등 뒤에서 총을 쐈다. 넴초프는 네 발의 총알을 맞았는데 이 중 한 발이 심장에 박혔다. 총을 쏜 괴한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현장에서 발견된 총탄은 제각각 생산지와 시기가 달랐다.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라는 증거다.

알렉산더 바스트리킨 러시아 검찰 조사위원회 위원장은 넴초프가 청부살인을 당했다고 보고 배후를 찾고 있다. 수사 당국은 특히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뜨리려는 반(反)정부 세력이나 넴초프가 ‘샤를리 에브도’에 지지를 보낸 데 원한을 품은 이슬람주의자, 또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극단주의자나 마피아 등이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바스트리킨은 정작 가장 유력한 다섯 번째 가설을 삭제했다. 바로 그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판해온 넴초프가 정치적 이유에서 암살당했다는 시나리오다.

보리스 넴초프(오른쪽)의 암살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 AP 연합 ⓒ EPA 연합
넴초프 암살 배후에 푸틴 자신이나 푸틴의 측근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은 크다. 넴초프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反)푸틴 인사였기 때문이다. 푸틴과 넴초프의 질긴 악연은 푸틴 정권이 출범한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8월12일 노르웨이 북쪽 바렌츠 해에서 러시아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가 침몰해 승무원 118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여름휴가 중이던 푸틴은 사고 보고를 받고도 3일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넴초프는 이때 푸틴의 초기 대응 미숙과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를 맹비난하면서 반(反)푸틴 인사로 회자됐다.

넴초프 “푸틴이 나의 죽음 원할 것”

정권 초기의 악몽과 같은 경험 때문일까. 푸틴 정부는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정치인과 언론인에 재갈을 물렸고, 비협조적인 재계 인사들은 가차 없이 표적 수사 대상으로 삼았다. 그 사이 넴초프의 입지도 점점 좁아들었다. 게다가 푸틴 정부가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가 겪은 혼란기를 ‘옐친 정부가 만들어낸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하면서 옐친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넴초프는 비호감 정치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넴초프의 반격 기회는 10여 년 뒤에야 찾아왔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푸틴이 재출마 의사를 밝히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수만 명의 시민이 푸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넴초프도 공정선거 운동을 벌이는 등 반푸틴 시위에 앞장섰다. 하지만 푸틴이 63.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러시아의 야당 운동은 희망을 잃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 사건을 읽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반푸틴 인사로 낙인찍힌 넴초프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푸틴 정권을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총격 사건이 일어난 2월27일 저녁에도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45분간 푸틴의 실정을 낱낱이 들추고 개혁을 요구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親)러시아 성향의 분리주의자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정책에 반대하기 때문에 푸틴은 나의 죽음을 원할 것”이라고 말해 곧 벌어질 사태를 예견한 듯했다.

사건 직후 넴초프의 측근들은 한목소리로 “넴초프가 우크라이나 관련 보고서 작성을 계획 중이었다”고 밝혔다. 반정부 활동가인 일리야 야신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저질러진 살인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다시피 러시아에서 이런 비판은 생명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미하일 사카슈빌리 전 조지아(구 그루지야) 공화국 대통령 역시 “넴초프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는 게 더 놀랍다”고 말해 넴초프가 푸틴 정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을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실제로 2월 마지막 주에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사태 배후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러시아 안팎에서 나와 푸틴 정권을 곤경에 빠뜨렸다. 2월24일 러시아의 일간지 ‘노바타 가제타’는 1년 전 러시아 정부가 작성한 전략 계획서를 공개하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의 배후라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지난해 2월 말 크림반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대가 나타나면서 시작됐다. 이들이 우크라이나로 통하는 통신망을 파괴하고 분리주의자들을 도운 결과 3주 만에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선언서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명을 한 것이다. 그동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리 세력을 지지한다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월25일에는 미국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필립 브리들러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최고사령관이 미국 하원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러시아가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대대적인 정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의 서방 확장을 알리는 증거가 속속 등장하자 부담을 느낀 푸틴 정권이 ‘행동’을 취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수사가 진행되어도 푸틴 배후 의혹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슈피겔 온라인’과 ‘차이트 온라인’ 등 독일의 주요 온라인 매체들은 3월3일 “범행 장소가 크렘린궁에서 불과 200여 m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사건 발생 당시 주요 CCTV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사건 직후 공개된 CCTV 영상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촬영된 탓에 범인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푸틴의 증오 정치가 낳은 비극”

비록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푸틴 책임론’은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그동안 푸틴이 ‘야당 죽이기’에 박차를 가해왔기 때문이다. 푸틴은 2012년 “야당 지지자와 시민 활동가들의 목표는 오직 러시아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말로 새 정권의 출범을 알렸다. 지난해에는 야당을 ‘민족의 반역자’라고 표현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낳았다. 미하일 카시아노프 전 러시아 총리는 “푸틴이 증오의 정치를 펼쳐 넴초프가 살해됐다”며 푸틴의 도덕적 책임을 지적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전 체스 세계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 역시 “넴초프가 살해당한 것은 러시아 TV가 하루 종일 증오의 분위기를 부추긴 결과”라고 분석했다.

넴초프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러시아의 야당 운동은 위기를 맞았다.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은 시민들에게 공포와 무기력함을 안겨주었다. 진보 성향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러시아 통합민주당 당수는 이와 같은 ‘공포의 무게’에 대해 “(우크라이나에서 진행 중인) 전쟁이 우리에게로 왔다”고 표현했다. 지난 3월1일 당초 넴초프가 참가하기로 예정되었던 푸틴 비판 집회도 취소됐다. 대신 열린 넴초프 추모 집회에는 5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이날 열리기로 돼 있던 집회의 명칭은 ‘봄’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