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종북 싸움’ 할 때 그들은 ‘절제’를 말했다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5.03.1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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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트 대사 습격 사건 바라보는 워싱턴 ‘테러’ 규정 거부하며 정치적 확산 차단

3월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습격을 당하자 미국 언론들은 사실 보도를 바탕으로 신속히 소식을 전했다. 처음의 제목들 중에는 ‘리퍼트 대사, 칼로 얼굴을 베였다(slashed, knifed)’는 표현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공격, 그리고 피습이 분명해지자 보도 태도가 조금씩 변화해갔다. ‘베였다’는 표현은 이내 ‘습격(attack)’으로 바뀌었다.

일부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피습이 ‘테러(terror)’로 격상될 움직임이 없진 않았다. 그 표현 수위가 확대될 무렵 사태의 확산을 막은 것은 미국 국무부였다. 사건 발생 다음 날인 3월6일, 국무부에서 열린 정례 브리핑에 참석한 기자들은 외교관의 안전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때를 기다린 듯 마리 하프 국무부 부대변인도 작심하고 나섰다. “내가 3시간이 걸리더라도 질문에 다 대답할 테니 모든 문제를 한번 다뤄보자”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미국 CNN 방송이 3월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소식을 속보로 전하고 있다. ⓒ CNN 화면 캡처
“끔찍한 폭력 행위일 뿐 테러는 아니다”

하프 부대변인에게 한 기자가 이번 피습 사건의 중대성을 지적했다. 기자는 2012년 9월 발생한 리비아 벵가지 미국 영사관 피습 사건 때 크리스토퍼 스티븐슨 대사가 숨진 것을 언급하며 ‘외교관의 안전 문제’를 거듭 추궁했다. 하프 부대변인은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한다면, 이번 사건은 벵가지 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 사건을 당신은 ‘폭력 행위(act of violence)’라고 강력하게 비난했고, 존 케리 국무장관도 ‘몰상식한 공격(senseless attack)’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한국 일부 정부 관료나 일부 매체에서는 이를 ‘테러(terror)’ 혹은 ‘테러리스트 행위(terrorist act)’라고 보고 있다. 당신은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이 잇따라 나왔다. 하프 부대변인은 “나와 장관은 당신이 말한 대로 규정했고, 분명히 이는 ‘끔찍한 폭력 행위(horrible act of violence)’다. 하지만 우리는 범행 동기나 실제로 발생한 일에 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 사건에 관해 그 이상의 말로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이번 사건을 평가하는 하프 부대변인의 결론은 이랬다. 첫째, 일단 서울은 매우 안전한 곳이다. 둘째, 이번 사건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외교관 테러 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프 부대변인은 왜 팔을 걷고 한국 변호에 나섰을까. 현실적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리비아 벵가지 미국 영사관 피습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미국 대사 등 자국민 4명이 숨지면서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관 안전 문제와 외교 대응 능력에 치명타를 입혔다. 당시 외교 책임자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었다. 미국의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 모두에게 벵가지는 아킬레스건이다. 대사가 피해자가 됐다는 공통점 때문에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이 벵가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확산을 막는 데 중점을 둬야 했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테러’ 규정이 가져오는 후유증이다. 미국은 테러로 규정하면 반드시 보복을 해야 하는 나름의 국가 철학을 갖고 있다. 2012년 발생한 벵가지 영사관 테러 사건도 특수부대를 동원해 리비아에서 주모자를 체포했고 미국 본토로 이송해왔다. 반면 테러 규정에 따른 후유증도 염려해야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9·11 사건이다. 9·11을 테러로 규정한 뒤부터 전쟁의 늪에 빠져든 것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테러 규정에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2013년 4월15일 발생한 ‘보스턴 마라톤 폭발(bombing, explosion)’ 사건이다. 우리는 주로 테러라고 말하지만, 막상 미국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테러라고 보도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당시 폭발이 일어나고 3명 사망, 183명 부상이라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류 매체는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신중을 기했고, 결국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

당시 백악관의 반응도 그랬다. 오바마 대통령은 첫 성명에서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 비난 여론이 일자, “무고한 시민에게 시한폭탄을 터뜨리는 행위는 명백한 ‘테러 행위(a act of terror)’”라고 추후 언급했을 뿐이다. 테러라는 규정을 피해 ‘테러 행위’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다. ‘외로운 늑대’라고 표현되는 자생적 테러리스트가 일으킨 사건이었고, 과거라면 미국 연방수사국(FBI) 등 정보 당국이 이슬람 테러리스트 조직과의 연계를 쫓으며 테러로 규정할 법도 했지만, 그 이후에 생길 후유증을 고민한 결과였다.

리퍼트 대사 피습도 한국 언론에서는 ‘테러’라는 말머리로 사건을 규정하고, 정치권에서 ‘종북’을 따지고 있지만 워싱턴의 시각은 다르다. 이번 사건을 아무리 확대 해석하더라도 테러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해석이다. 마땅히 보복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 사건으로 리비아 대사의 죽음이 오버랩될지도 모른다는 점에 백악관은 더욱 신경 쓰고 있다.

“김기종을 ‘반미’ 대표하는 인물로 볼 수 없다”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장에서는 “한국 경찰은 북한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고 묻는 기자가 여럿 있었지만, 하프 부대변인은 “그것은 조사 사항으로 안다”며 문제의 확산을 막았다. “북한은 이번 사건을 ‘미국에 가해진 정당한 징벌’이라고 언급했다”고 물어도 “그러한 성명을 봤다. 불행하게도 그건 북한 정권의 속성이며 그들의 수사학적 표현과도 일치한다. 이를 더 강하게 비판해야 할 방법을 모르겠다”고 피해갔다. 북한 정권의 속성을 강조하며 오히려 북한과의 연계성을 미국 스스로가 차단하고 나선 셈이다.

전문가 집단 속에서도 이런 절제의 분위기가 흐른다. 정치적으로 전선을 확대하려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미국외교협회의 스콧 스나이더 연구원은 “한국에서 가끔씩 벌어지는 집단적 반미 시위는 보통 평화적으로 벌어지는데 이번 일과 같은 경우는 드문 사례다”라고 말했다.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리너 연구원은 “김기종씨와 같은 사람을 한국의 민족주의자 혹은 반미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볼 수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가해자 쪽이 펄펄 뛰고 피해자가 자제시키는 거꾸로 된 상황이 지금의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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