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19. 자유연애 가풍 속 정 ·관계 혼맥 깊어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3.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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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이후락·나웅배 집안과 사돈…CJ·한화 등 재벌가와 이어져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딸 민정씨는 오는 4월부터 ‘충무공 이순신함’(4400톤급)에서 전투정보보좌관으로 근무한다. 그는 지난해 4월 117기 해군사관후보생 모집에 지원해 합격, 같은 해 11월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재벌가 자제가, 그것도 아들도 아닌 딸이 군에 자원입대해 장교가 된 사례여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온갖 기사가 쏟아져 나왔는데 최근에는 ‘설 연휴 특별외박(18~22일) 기간 중 스키를 타다 다리를 다쳐 군(軍)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SK그룹의 창업자는 고(故) 최종건 회장이다. 최종건은 1926년 경기도 수원의 벌말(지금의 평동)에서 최학배 공과 이동대 여사의 4남 4녀(양분-양순-종건-종현-종분-종관-종순-종욱)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인 최두혁과 부친 최학배는 비교적 부유한 농부였다. 나무 장사를 위해 대성상회를 차리고, 수원 잠업시장에 볏짚과 왕겨를 납품하고, 인천 미곡취인소에 쌀을 공급하던 중소 상공인이었다. 최종건은 조부의 지시로 어렸을 때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4㎞나 떨어져 있었지만 집에서 제일 가까웠던 신풍소학교에 입학해 1942년 졸업했다. 우람하고 건강한 체질이어서 운동을 좋아했던 최종건은 신풍소학교 축구선수로 활약하면서 전국소년축구대회에도 출전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둘째 딸 민정씨가 2014년 11월26일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제117기 해군 사관후보생 임관식에서 어머니 노소영씨와 만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 된 ‘선경직물’ 인수

<SK 50년>은 이와 관련해 ‘유소년기의 최종건은 자유분방하고 패기만만했다. (중략) 장난이 심했던 소년 최종건에게 부친 학배 공이 매라도 들라치면 최종건의 조부가 “사소한 일로 자주 매를 들면 공연히 어린아이들의 호연지기만 꺾는다”며 말렸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최종건 창업 회장은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으로 자라났으며 보스 기질이 강해 또래들이 유난히 잘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풍소학교를 졸업한 최종건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스스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선택해 진학했다. 그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적성에도 맞고 훨씬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최종건의 판단은 그의 운명의 길을 가르는 선택이 됐다. 최종건이 그때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어쩌면 SK 창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적산 기업인 선경직물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았고, 6·25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의 기계들을 모아 직기를 조립하고 회사를 인수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서서히 제조업이 발흥하던 당시의 시대상과도 딱 들어맞는 흐름이었다. 무엇을 원하든 흐름에 올라타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최종건 창업 회장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다.

직업학교를 졸업한 최종건은 부친의 권유로 고향에 있는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선경직물주식회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기업들인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이 두 회사의 앞 글자를 따서 ‘선경(鮮京)’이라는 회사 이름이 만들어졌고, 그 영문 이니셜을 따서 지금의 SK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당시 최종건은 3급 기사 자격증이 있는 기술자로 입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수도 생겼다. 18세에는 생산부 2조장으로 발탁됐다. 100여 명의 종업원을 편성해서 운영하고, 생산 계획과 품질 관리까지 도맡아 운영하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최종건 평전간행위원회’가 펴낸 최종건 평전 <공격 경영으로 정면 승부하라>(이하 <평전>)에 따르면, 해방 정국의 혼란은 그가 동료들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청년 최종건은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로 하여금 무사히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신에 수많은 종업원의 일터인 회사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가 광복 직후 고향 평동의 치안대장을 맡았을 때도 적산 물품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자 번호표를 뽑게 해 물건을 골고루 나눠주는 식으로 원만히 처리했던 것도 그의 리더십을 엿보게 하는 한 장면이다.

‘3공’ 시절 박정희·김종필 도움 받아

SK 창업의 밑바탕은 최종건이 선경직물을 불하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광복 이후 최종건은 명목상의 한국인 주주들이 관리인이 된 선경직물에서 생산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면서 선경직물은 잿더미가 돼버렸다. 폐허 속에서 불에 탄 공장을 인수할 사람이 없었다. <평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관리인으로 있던 황청하와 김덕유에 의해 불하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만약 공장이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다면 이들 두 관리인에 의해 불하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선경직물의 관리 책임을 포기한 상태였다. 최종건은 선경직물 토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던 차철순과 협의해 그가 갖고 있던 지가증권으로 불하 계약금액인 13만환을 납부하고 1년 내에 이 금액을 현금으로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차철순과 공동으로 불하를 받았다. 이후 최종건은 13만환을 모두 갚고 차철순으로부터 공동매수인 권리포기각서를 받은 후 1953년 10월1일 선경직물 창립을 선포했다.’

원사 구입 자금과 인건비로 어려움을 겪던 최종건의 숨통을 틔워준 것은 당시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던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감’이었다. 이 두 상품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최종건은 선경직물 매수대금의 잔금을 다 갚았고 큰돈을 벌었다. 1956년에는 수원시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수원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창업기를 지나 도약기로 가는 길목에서 최종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다. 경희대 김한원 교수는 <SK그룹 최종건 창업 회장의 창업 이념과 기업가 정신>에서 이렇게 썼다. ‘선경직물 인수 이후 열정과 집념으로 최종건이 기업 성장에만 몰두한 것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의 선경직물 수원공장 방문으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민정 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다시 찾았다. 대통령의 선경직물과 최종건 회장에 대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홍보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예컨대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히트 상품이 됐다.’

<평전>은 최종건-박정희 만남이 있기까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역할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일회담 막후 교섭차 김종필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환송회를 겸한 만찬장에서 박정희 의장은 이렇게 한탄했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들이니 대체 우리나라 경제를 누가 이끌어가겠습니까?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을 꼽자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특혜 없이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때 김종필이 나섰다. “수원에 선경직물이라고 있는데,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종필은 직계 부하인 이병희에게서 들은 대로 선경직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업을 일으킨 최종건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설명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최종현 전 회장(위 사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최종건 전 회장 ⓒ 시사저널 포토·뉴스뱅크이미지
동생 최종현 시대 넘어오며 정유·통신 확대

1962년 무역회사인 선경산업을 창립했고 1966년에는 선경화섬을 설립하는 등 사업 확대에 매진한 최종건은 1963년, 건국 후 민간 기업 대표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직물에서 원사까지 일괄 생산 체제를 갖춘 이후 그의 꿈은 정유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선경석유를 설립했으나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정유공장 설립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았다.

선경건설을 만들어 1973년 2월에는 워커힐호텔을 인수했다. 1962년 정부가 추진하는 관광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워커힐은 운영권이 교통부 산하의 국제관광공사에 있었다. 10년 내내 적자를 면치 못해 정부가 장충단의 영빈관과 함께 민간 기업에 팔기로 방침을 정한 상태였다. 최종건은 워커힐을 내정가보다 비싸게 일시불로 인수하겠다고 선언했고, 박정희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호텔을 만들어달라”는 조건을 붙여 수락했다. 워커힐 인수는 그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프로젝트였다. 그해(1973년) 11월, 최종건은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생을 마쳤다.

급작스러운 최종건의 죽음으로 그룹의 운영을 맡은 것은 동생인 최종현이었다. 고(故) 최종현 회장은 자신이 쓴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에서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선경의 모체인 선경직물은 1953년에 창립되었다. 6·25 사변으로 모두 파괴된 기계들을 모아 15대의 직기를 재조립해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1953년 4월이었다. 나는 이 시기를 선경의 실질적인 창업 시기로 보고 있다. 전 회장(최종건)이 공장 관리를 맡았고 나는 판매 및 구매 관리를 맡았는데 장사가 잘되었다. 1954년 나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했는데 전 회장의 독촉에 못 이겨 1962년 11월 귀국했다. 그때 와서 보니 15대의 직기가 162대로 늘어났고, 새로 주문한 140대가 설치되고 있었으므로 8년 동안 20배 정도 확장된 셈이었다.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세우게 됐다. 그러던 중 1973년 11월 전 회장이 돌아가시게 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본인이 선경을 맡게 되었다.’

최종현은 형의 숙원이자 그룹의 전략 사업이었던 정유업에 관심을 가졌다. 1980년 유공(현 SK이노베이션)을 인수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하며 정보통신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아 오늘에 이른다.

재벌가에선 독특하게 외국 남성과 결혼도

SK가는 재벌가 가운데 유난히 연애결혼이 많다. 이런 배경에는 고 최종현 전 회장의 영향이 컸다. 최종현은 결혼식을 간소하게 하는 것을 선호했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크게 구별을 두지 않았다. “배우자는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SK가의 혼맥과 관련해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 고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사돈 관계를 맺는 등 정치인 집안이 눈에 띈다.

최종건 창업주는 24세에 노순애와 결혼했다. 평소 노순애를 눈여겨본 큰누나 최양분이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건은 노순애와의 사이에 3남 4녀(윤원-신원-정원-혜원-지원-예정-창원)를 뒀다. 장남인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 채헌씨와 결혼했다. 미국 엘론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78년 선경합섬(SK케미칼 전신)에 입사했다. 1992년 12월 SK케미칼 부회장에 오른 뒤로는 사실상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일임했다. SK케미칼 회장으로 있던 2000년 나이 50세에 지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슬하에 1남 3녀(서희-은진-현진-영근)를 뒀다. 아들 최영근은 현재 SK그룹 계열사의 급식 사업을 전담하는 후니드의 대주주다.

최종건 창업주의 차남인 최신원 SKC 회장은 백종성 전 제일원양 대표의 딸 백해영과 결혼해 1남 2녀(유진-영진-성환)를 뒀다. SKC 상무인 아들 최성환은 2010년 신조무역 최용우 회장의 장녀 최유진과 혼인했다. 최신원-최성환 부자가 모두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쳐 병역 미필자가 많은 재벌가 자녀들과 대비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종건의 장녀 최정원은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 고광천과 혼인했고, 차녀 최혜원의 남편은 박장석 SKC 부회장이다. 4녀 최예정의 시아버지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으로 최종건과 이후락은 호형호제할 정도로 관계가 남달랐다. 최예정의 남편은 이후락의 3남인 이동욱이다. 이동욱의 형인 이동훈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나인 김영혜와 결혼했고, 이동훈의 장남은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장녀 손희영과 혼인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SK가(家) 혼맥은 CJ가·한화가와 연결된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고 최종현 전 회장과 고 박계희 여사의 장남이다. 부인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51)이다.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은 채서영 서강대 영문과 교수와 결혼했다. 최태원은 2013년 1월 횡령 혐의로 기소되었고, 지난해 2월 징역 4년형이 확정돼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최재원도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돼 복역 중이어서 형제가 모두 옥고를 치르고 있다. 최종현 전 회장의 막내딸인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은 SK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던 김준일씨와 결혼했지만 이혼했다.

최종건 전 회장의 둘째 남동생인 최종관 전 SKC 고문은 장명순과의 사이에 1남 6녀를 뒀다. 장녀인 최순원은 재벌가에서는 독특하게 외국인 존 캐리파크너와 결혼했다. 3녀 최경원은 김종량 전 한양대 총장과, 4녀 최은성은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의 차남인 나진호와 혼인했다. 최종건 전 회장의 막내 동생인 최종욱 전 SKM 회장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맡았던 조동성 서울대 교수의 누나 조동옥과 결혼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재무부장관을 지낸 서봉균씨의 사위인 조동일 서울대 공대 교수의 누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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