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숨 쉬던 곳 지켜내지 못해 안타깝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5.03.1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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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터줏대감’ 예술가 김남균씨가 회고하는 그때 그 홍대 앞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1890년 무렵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 파리가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번영을 누린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다. 공업화와 해외 식민지 개척으로 부가 쌓였다. 후기 인상파 미술, 에펠탑 건축 등 문화가 꽃피었다. 여유와 활력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호시절’은 얼마 못 가서 거짓말처럼 끝났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다. 전쟁의 참화로 일거에 사그라졌다.

김남균씨(41)는 1998년부터 홍대 앞을 찾았다. 서양미술을 전공하는 예술가, 일러스트레이터 공급업체 대표, 갤러리·카페 운영자 등을 차례로 거치며 17년째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김씨에게도 ‘벨 에포크’가 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다. 김씨가 기억하는 홍대 앞 문화의 ‘호시절’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시절도 이제 끝나가고 있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김씨는 홍대 앞의 오늘과 내일을 우려한다. 그건 아마도, 전쟁과도 같은 ‘돈’의 참화 때문일 것이다.

2010년 7월 홍대 앞에서 열린 ‘프리마켓’ 풍경. ⓒ시사저널 임준선
2000년대 중반 ‘가장 재미있던 시절’

과거 홍대 앞에는 석탄가루가 날렸다. 당인동에 있는 서울화력발전소 탓이다. 주민들이 밖에 빨래를 널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 초 발전 연료가 석탄에서 LNG로 바뀌었다. 도심 매연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것이 홍대 앞 문화가 태동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석탄을 나르던 철길 자리에 현재의 주차장길이 들어서는 등 ‘공간’이 생겼다. 당시 청년문화를 대표하던 곳은 신촌 일대였다. 상권이 커질 대로 커지면서 부동산 임대료가 치솟았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홍대 앞 공간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남균씨는 “돈이 많지 않아도 무언가 해보고 싶었던 의욕 있는 작가들이 작업실을 차리면서 홍대 앞에 문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작업실을 마련한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됐다. 임대료가 비싸지 않았다. 돈벌이보다는 창작·축제에 활동의 방점이 찍혀 있었다. 당시는 1990년대 후반이다. 민주화 이후 10여 년이 흘렀다. 만개한 소비·대중문화에 젖줄을 대고 자란 세대의 활동이 본격화되던 때다. 참신하면서도 대중 친화적인 문화적 자극을 원하는 소비층이 있었다. 그들이 홍대 앞을 주목했다. “클럽문화가 활성화됐다.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술집·카페 등에서 전위적인 예술을 공연하기도 했다. 상권 안에서 다양한 실험적 예술의 판이 벌어졌다. 신기하고 재밌는 게 많으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크고 작은 축제가 활성화됐다. 예술가들의 창의력이 거리로 분출됐다. 공원과 놀이터에서 열리는 ‘프리마켓’에서 각종 미술·공예품이 성황리에 팔렸다. 젊은 작가들이 직접 거리에 나와 대중과 소통하는 자리를 열었다. 새롭고 기발한 작품에 관심을 갖는 ‘대안 문화공간’도 곳곳에 생겼다. 김씨는 “고급 갤러리에 파워가 집중됐던 미술판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당시 홍대 앞에 있던 미술가들은 스스로 판도를 바꾸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고 말했다. 당시 흐름을 주도한 이들 중 상당수는 영향력 있는 예술계 인사, 스타 작가 등으로 발돋움하기도 했다.

김남균씨는 건물주의 횡포 탓에 홍대 앞 문화가 파괴돼온 과정을 지켜봤다. ⓒ박김형준 제공
“신촌이 겪은 쇠퇴 과정, 홍대가 똑같이 밟아”

김남균씨는 ‘가장 재미있던 시절’로 2000년대 중반을 꼽았다. 다양한 분야와 장르의 예술가들이 홍대 앞에 모여 창의력을 극대화하던 때다. 파주출판단지 조성으로 대형 출판사가 서울을 빠져나갔다. 파주로 향하는 교통 거점이 합정동에 만들어졌다. 그 결과 아현동·충무로 쪽에 분포됐던 각종 출판 관계 산업체들이 홍대 앞으로 몰렸다. 시인·소설가·일러스트레이터 등도 홍대 앞에 작업실을 꾸리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음악·미술 등이 중심이 됐던 문화에 출판·문학이 더해진 것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사귀고 깨지고 하면서 자연스레 ‘융합’ 예술이 가능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단골 술집에 가면 연극인, 미술가, 음악인, 축제 기획자, 대안 공간 운영자 등이 모여 있었다. 함께 어울리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한번 해볼까’라며 작품을 만드는 식이었다. 우리가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외 그 어떤 문화예술특구도 부럽지 않았다.”

2000년대 후반이 되자 홍대 앞 예술가 상당수가 문래동 쪽으로 빠져나가는 흐름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상황의 심각성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함께 어울렸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하나둘씩 홍대 앞을 떠나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작업실·가게를 지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사에 이사를 반복하며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김씨 역시 2010년, 운영하던 갤러리를 상수동 외곽으로 이전해야 했다. 홍대 앞 문화공동체는 믿기 힘든 속도로 해체돼갔다. 그 시절 홍대 앞에서 활동했던 이들 대다수는 이런 상황을 못내 안타까워한다. 공통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홍대 앞을 떠나지 않은 친한 뮤지션이 내게 이런 말을 하더라. 30년 정도는 걸렸어야 적응할 수 있었던 변화가 불과 2~3년에 일어난 느낌이라고. 이 말이 최근 홍대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듯하다.”

김남균씨는 최근 이런 얘기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홍대 앞은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자꾸 과거의 홍대 앞을 얘기하는 건 이미 떠난 사람 옷자락을 붙잡는 것에 불과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꾸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무의미한 되새김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김씨는 여전히 안타깝다.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열정이 숨 쉬던, 과거 홍대 앞의 분위기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과거 신촌이 지금 홍대 앞과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상권이 커질수록 보호받지 못한 상인과 예술가들이 대거 쫓겨났다. 결국 문화도 사라지고 상권도 쇠퇴했다. 불과 수년 안에 홍대 앞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때 우리 곁에서 꽃을 피웠던 홍대 앞 ‘벨 에포크’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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