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만화 우물’에서 영화를 퍼올리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5.03.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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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만화처럼, 만화는 영화처럼 만드는 디즈니의 전략

우리는 이미 신데렐라를 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계모와 새언니에게 구박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왕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하는 아름다운 소녀. 마법으로 만든 드레스와 유리 구두 차림으로 무도회에 가는 소녀 이야기가 딱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를 화려한 영상으로 옮겼을 때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신데렐라>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고전이자 1950년 발표된 디즈니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동명 작품을 실사로 옮긴 것이다.

유럽 민간 설화인 <신데렐라>는 이야기마다 그 버전이 조금씩 다르다. 요정 대모가 신데렐라에게 마법으로 호박 마차와 유리 구두를 선물하는 것은 1697년 샤를 페로가 발표한 <상드리용(Cendrillon)>에 나오는 내용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이 버전을 원작으로 했고 이번 실사 영화는 자사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한 것이니, 이야기의 기본 줄기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좀 더 친절해진 면은 있다. 주인공에게는 엘라(릴리 제임스)라는 이름이 있지만 집안일을 하느라 더러워진 차림새 때문에 신데렐라(‘재투성이’라는 뜻)로 불리게 됐다는 사실을 짚어준다거나, 왕자가 강대국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라는 설정이 극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얽혀 있는 식이다.

영화 ⓒ 월트디즈니코리아 제공
화려한 영상으로 스토리 특별하게 만들어

21세기에도 여전히 신데렐라는 친부모를 잃고 구박을 받다가 왕자와 결혼한다. 다만 주제의식은 분명해졌다. 신데렐라를 구원하는 것은 단순히 마법이나 왕자가 아니라 신데렐라 자신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용기와 따뜻한 마음,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눈이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중요한 자질이라고 말한다. 대책 없이 순수한 교훈이긴 하지만, 동화를 각색한 ‘프린세스 스토리’가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화려한 영상이다. 요정 대모(헬레나 본햄 카터)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차림새로 변한 엘라가 무도회장에서 왕자와 춤을 추는 장면, 자정을 알리는 타종 소리에 호박 마차의 마법이 풀리는 장면 등에서 CG와 상상력을 버무린 마법 같은 화면이 펼쳐진다. 무자비한 악당에 가까웠던 계모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악녀로 그리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극 중 계모는 첫 남편도 모자라 재혼한 남편까지 죽어버린 상황에서 딸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고달픔을 내비친다. 엘라처럼 따뜻하고 강인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역시 숨기지 않는, 어찌 보면 퍽 인간적인 캐릭터다. <블루 재스민>

(2013년)으로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던 케이트 블란쳇이 계모를 연기하며 극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이처럼 원작에 대부분 충실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꾀한 <신데렐라>의 각색은 제작진이 상상력을 마구 발휘했던 <말레피센트>(2014년)의 각색보다는 나아 보인다. 디즈니가 자사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년)를 모티브 삼아 만들었던 영화다. 공주에게 저주를 건 나쁜 마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야심까지는 좋았지만, <말레피센트>는 디즈니 특유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알고 보면 마녀가 사랑에 상처받고 삐뚤어진 여자였다는 사연이 딱히 재미있는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디즈니가 공주가 아닌 마녀, 그러니까 처음으로 악당을 주인공 삼아 얻은 이점이 무엇인지 궁금하기까지 한 영화에 가까웠다.

중요한 건, 이처럼 조금 실망스러웠던 만듦새에도 <말레피센트>가 박스오피스에서 엄청나게 선전했다는 사실이다. 제작비 1억8000만 달러를 들인 이 영화가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돈은 7억5000만 달러가 넘는다. 디즈니가 동화를 기반으로 한 실사 영화를 꾸준히 선보이는 데는 이토록 명백한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돈이 되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스토리로 만든 시나리오를 찾아보기 어려운 건 최근 할리우드의 경향 중 하나다. 온갖 실화와 그래픽 노블과 소설이 영화화되는데 디즈니라고 주력 분야인 동화 세계를 멀리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실사 영화로 리메이크할 수 있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훌륭한 재산까지 가득한데 말이다.

를 비튼 ⓒ 월트디즈니코리아 제공
‘동화 원작+스타 감독+스타 배우’의 법칙

디즈니에 확신을 안겨준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년)다. 팀 버튼과 조니 뎁 콤비가 손을 맞잡은 이 영화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며 디즈니를 기분 좋은 충격에 빠뜨렸다(인기에 힘입어 2016년 개봉 예정으로 속편도 제작 중이다). 이때부터 디즈니가 제작하는 실사 영화에는 ‘동화 원작+스타 감독+스타 배우’라는 일종의 법칙이 생긴다. 샘 레이미 감독의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2013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미술감독이었던 로버트 스트롬버그가 연출가로 나선 <말레피센트> 같은 영화가 그렇게 탄생했다. 2010년대 들어 유니버설 픽처스, 워너 브러더스 등 다른 대형 스튜디오도 동화를 각색한

<헨젤과 그레텔: 마녀 사냥꾼>(2013년), <잭 더 자이언트 킬러>(2013년) 등의 작품을 내놓았지만 흥행이나 비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디즈니의 마법(Disney Magic)’이라 일컬었다. 동화 콘텐츠의 절대 강자는 역시 디즈니라는 얘기다.

앞으로 디즈니는 ‘월트 디즈니 클래식’ 시리즈로 발표했던 애니메이션을 영화로 만들어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신데렐라>는 그 시작을 알리는 영화다. <아이언맨> 1, 2편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존 파브로가 메가폰을 잡은 <정글북>,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만들었던 빌 콘돈 감독의 <미녀와 야수>가 줄줄이 제작된다. <정글북>과 <미녀와 야수>는 워너 브러더스에서도 각각 앤디 서키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에게 맡겨 제작을 준비 중이기 때문에 ‘디즈니의 마법’이 이번에도 통할지가 할리우드의 관심사 중 하나로 떠오른 상황이다.

지난해 개봉한 <겨울왕국> 속 공주는 왕자보다 자매애를 바탕에 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등 한층 진일보한 캐릭터였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점점 더 용감해지는 데 반해, <신데렐라> 같은 실사 영화 속 주인공은 점점 더 착한 마음씨와 ‘해피 에버 애프터’를 강조하는 디즈니의 전통적 세계관에 가까워지고 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 두 장르에서 동화를 다루는 디즈니의 두 가지 방향성이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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