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한테 주던 밥을, 그라믄 안 되지예”
  • 경남 창원=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03.2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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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무상급식 중단 사태 맞은 경상남도 민심 르포

“도지사예? 서울서 내려온 능력 있는 분이고 추진력 하나는 있다 아입니꺼. 그라긴 한데….” 초유의 무상급식 중단 사태를 맞은 경상남도 민심 취재를 위해 도청 소재지인 창원시를 찾은 3월18일 오전. “홍준표 지사가 일을 잘하는 것 같으냐”고 묻자, 택시기사 유 아무개씨(60)에게서 나온 첫 반응이다. 말끝을 흐리던 유씨가 잠시 말 매무새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무상급식 중단과 관련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이어갔다. “(무상급식 중단) 고거는 솔직히 그렇지예. 아~들한테 주던 밥을 안 준다 그라믄 안 되는 거 아입니꺼. 고거는 그라믄 안 되지예.”

기자가 경남도 민심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일부 지역민 중에는 홍 지사의 무상급식 중단 결정을 지지하는 이도 있었다. 창원시 성산구 반송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 이 아무개씨(57)는 “진주의료원 폐업 문제만 놓고 봐도 여론 눈치만 보면서 어느 도지사도 손을 대지 못한 것을 홍 지사가 해결한 것 아니냐”며 “무상급식은 좌파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중단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홍 지사가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3월19일 경남도의회 앞에서 열린 무상급식 지키기 경남학부모대회에서 학부모들이 식판을 들고 무상급식 중단에 항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벌써 애들 사이에 아빠 수입 비교”

하지만 무상급식 중단에 대해선 반대 여론이 우세했다. 특히 취학 아동을 자녀로 둔 30~40대 학부모들의 반응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반송시장에서 만난, 초등학교 4, 6학년 두 자녀를 둔 학부모 김 아무개씨(42·여)는 “지난해 도지사가 무상급식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올 때만 해도 예산 부족 문제의 심각성을 중앙정부에 알리려고 그러는 거겠지, 설마 무상급식이 중단되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이게 현실이 되니깐 황당하다”며 “한 달 급식비가 5만~6만원 선이라고 하는데 두 아이 급식비로 10만원 이상이 든다. 아이를 위해 들었던 보험도 해지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중학생 자녀를 둔 박 아무개씨(43·여)도 “어른들이 무상급식·유상급식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 자체가 자녀를 둔 부모로서 가슴 아픈 일”이라며 “벌써부터 아이들 사이에 아빠의 수입이나 직업에 대해 서로 비교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남 지역은 홍준표 도지사 취임 직후인 지난 2013년 진주의료원 폐업으로 인해 갈등이 증폭됐다. 하지만 무상급식 중단 사태는 진주의료원 폐업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의 조직화된 반발이 아니라, 홍 지사에 반대하는 지역 민심이 저변에서부터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무상급식 중단 선언 이후 학부모들은 자생적으로 카카오톡·밴드 등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무상급식을 주제로 한 커뮤니티를 개설하며 홍 지사 반대 여론을 만들어가고 있다. 친환경무상급식지키기 경남운동본부 서우향 상황실장은 “시민사회단체와 관련이 없던 일반 학부모들도 ‘집회 신청 요청을 어떻게 하느냐’고 문의해온다. 무상급식 중단이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무상급식 중단 사태를 겪으면서 정치를 잘 모르던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정말 선거에서 투표를 잘해야겠구나’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성난 민심이 확인된다. 경남CBS가 여론조사 전문 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3월14~15일 경남 도민 성인 남녀 1022명(전화면접, 응답률 17.1%,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p)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남도의 무상급식 중단 의견 조사 결과, ‘잘못한 결정’이라는 의견이 59.7%로 ‘잘한 결정’이라는 의견(32.0%)에 비해 2배 가까이 많았다. 경남도가 무상급식 지원을 중단한 예산으로 ‘서민 자녀 교육지원 사업’을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무상급식을 현행대로 유지하고 서민 자녀 교육지원 사업은 교육청과 협의해 추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60.0%로 나타났다. 반면 ‘무상급식 예산을 서민 자녀 교육지원 사업에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은 33.0%에 그쳤다.

“홍 지사, 경남의 황제 정도로 착각하는 듯”

무상급식 중단 반대 여론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 홍 지사와 경남도는 일종의 착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태봉 경남도 공보관은 “전통적으로 경남은 노조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야(野)세가 강한 지역”이라며 “언뜻 무상급식 중단을 반대하는 의견이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무상급식 중단을 지지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숨은 지지층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지역 여론을 무시하는 홍 지사의 ‘무상급식 중단 드라이브’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민자녀지원 조례안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혀온 새누리당 소속 하선영 경남도의원은 “무상급식 중단이 아킬레스건이 돼 다음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경남에서 힘든 선거를 할 것이라는 걱정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이제라도 무상급식이 이뤄지도록 생각을 되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지역민의 여론에 민감한 경남 지역 새누리당 의원들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남에 지역구를 둔 한 국회의원은 “야당이 주장하는 ‘보편적 복지’가 한국 실정에 맞지 않고, 무상급식 중단이라는 대원칙에도 공감한다”면서도 “하지만 홍 지사가 지역의 반대 여론을 수렴하고 설득하면서 무상급식 중단을 추진해야 했는데 방법이 잘못됐다. 지역구 국회의원들과는 공식적인 논의도 없었다. 원칙은 맞지만 절차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남도는 시민사회단체가 요구하는 무상급식 중단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에 대해서도 “도의 업무가 아닌 교육청 업무”라면서 주민투표 신청을 거부하고 있다.

‘홍준표식 밀어붙이기 도정 운영’에 대한 비판 여론은 점점 커지는 양상이다. 3월16일부터 3일간 무상급식 중단 반대 단식 농성을 벌였던 여영국 경남도의원(노동당)은 “진주의료원 폐업 때부터 자신을 마치 경남도의 황제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고 실제로 행동도 그렇게 하고 있다”며 “자신이 말을 하면 반대 의견이 어떻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실현해야 한다는 아집에 빠져 있다”고 비난했다. 공직사회 일각에서도 홍 지사의 소통 없는 일방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경남 지역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홍 지사가 갈등만 유발시키는 행정을 펴는데 누구도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반대를 했다가는 도지사에게 바로 찍히기 때문에 공직자들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게 최고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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