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샷엔 아빠의 땀방울이 맺혀 있다
  • 안성찬│골프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3.24 15:0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타 선수의 ‘골프 대디’…김효주·리디아 고 아버지 딸에게 ‘올인’

한국 선수들이 미국 그린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태극낭자들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3월8일 박인비(27·KB금융그룹)가 4개월간의 침묵을 깨고 LPGA 투어에서 올 시즌 첫 승을 거두면서 한국 선수들이 잇따라 승전보를 전해오고 있다. 한국계 교포 선수까지 치면 5개 대회가 끝난 현재 승률 100%다. 이렇게 하다가는 우승하는 게 뉴스가 아니고, 우승하지 못하는 게 뉴스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나연(27·SK텔레콤)이 개막전인 코스 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더니, 데뷔전을 가진 루키 김세영(22·미래에셋)이 뒤이어 퓨어실크-바하마 LPGA 클래식에서 기분 좋게 첫 우승을 거뒀다. 이어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가 세계 랭킹 1위의 자존심을 걸고 ISPS 한다 호주여자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리디아 고가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뉴질랜드오픈에서 우승하는 사이 LPGA 투어에서는 양희영(26)이 스테이시 루이스(미국)를 2위로 끌어내리고 우승컵을 안았다.  박인비는 베테랑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2013년 메이저 대회 3개를 포함해 6승을 올리고 지난해 3승을 거둔 데 이어 4개월 만에 다시 정상에 오른 것이다.

2014년 9월15일 김효주가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자 아버지 김창호씨가 어깨에 태극기를 걸쳐주고 있다.ⓒ 연합뉴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맹연습

한국 여자 선수들은 왜 이렇게 강한 것일까. 한국 여자 선수들은 미국이나 유럽 선수에 비해 체격과 파워 면에서 밀린다. 그럼에도 ‘기술’과 ‘정신력’으로 한계를 극복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선수의 가슴에는 ‘헝그리 정신’이 깊게 깔려 있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맹연습을 한다. 이는 탄탄한 기본기와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강한 근성을 길러준다. 특히 LPGA 투어에서 우승하거나 상위 랭킹에 들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오직 훈련에만 집중한다. ‘올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수들이 성공하기까지는 ‘골프 대디(golf daddy)’가 그 몫을 톡톡히 했다. 한국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준다. 골프 대디의 원조는 ‘세리 키즈’를 탄생시킨 박세리(38·하나금융그룹)의 아버지 박준철씨다. ‘슈퍼 땅콩’ 김미현(38)은 온가족이 매달렸다. ‘중고 밴’을 타고 다니며 뒷바라지를 한 사람은 바로 김정길씨다. 사업가 집안으로 유복하게 자란 한희원(37)도 야구선수 출신의 한영관씨가 365일 지켜보며 훈련을 시켰다. 리디아 고(18·캘러웨이)의 아버지 고길홍씨는 골프를 본격적으로 가르치려고 골프 환경이 좋은 뉴질랜드로 아예 이민을 갔다. 박지은(36)의 아버지 박수남씨는 서울 강남의 삼원가든 건너편 연습장에서 골프를 지도하다가 더 큰 물에서 골프를 하라고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보냈다. 김효주(20·롯데)의 아버지 김창호씨는 밴을 구입해 이동하며 그곳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식당을 운영해본 김씨는 “효주는 밥심으로 버틴다”며 “직접 밥을 해 먹일 것”이라고 했다.

박세리는 특수한 경우다. 주니어 시절에는 아버지가 조련했지만 시스템을 갖춘 삼성그룹의 ‘세리팀’이 가동하면서 박세리를 ‘퀸’으로 만들었다. 삼성은 당시 세계적인 골프 교습가 데이비드 리드베터(미국) 캠프에 박세리를 합류시켰고 개인 매니저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세리의 탄탄한 기본기와 재능, 이것이 삼성의 지원과 결합돼 1996년 US여자오픈과 맥도날드LPGA챔피언십을 포함해 한 시즌 4승을 거두는 ‘맨발 신화’를 이룬 것이다.

일본의 한 프로골퍼는 “한국 선수들은 4시간 이상 소요되는 라운드에서 볼에 집중하는 능력이 남다르다. 김미현이 그 작은 체구에도 LPGA 투어에서 8승이나 올린 것은 자기 기분을 조절할 수 있는 ‘그 무엇’ 없이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오버스윙을 하는 김미현은 우드로 볼을 세울 정도로 피나는 훈련을 해 다소 무모한 미국 도전에 성공한 경우다.

정상을 달리는 선수들에겐 대부분 아빠 역할이 압도적이다. 주니어 시절부터 ‘인생=골프’라는 공식에 매달려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접고 모든 것을 투자한다. 프로골퍼를 만들려면 반드시 부모 중 한 사람이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게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다면 프로가 될 때까지 거의 10억원 안팎이 들기 때문에 ‘올인’할 수밖에 없다.

ⓒ AP 연합
두터운 선수층도 유망주 탄생의 기반

두터운 선수층도 유망주 탄생을 돕는다. 국내에서 톱 랭킹에 들어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국가대표를 지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나다. 여기에는 박세리가 불을 지폈다. 그의 ‘성공 신화’는 어린 학생들과 그 부모들에게 새로운 ‘롤 모델’이 되면서 골프 열기를 고조시켰다. ‘제2의 박세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골프에 뛰어든 선수들이 급증한 것이다. 박인비가 대표적인 ‘세리키즈’라면 김효주와 백규정(20·CJ오쇼핑) 등은 ‘리틀 세리키즈’로 불린다. 대한골프협회에 등록된 주니어 선수만 2800여 명, 이 중에서 1000여 명이 여자 선수다. 등록하지 않은 주니어까지 합치면 1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골프 종목이 포함되면서 주니어 선수들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선수들의 열정과 부모의 극성스러울 정도의 관심, 천부적인 손재주가 한국 선수들을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강한 집중력과 정신력까지 더해져 중무장하고 있다. ‘침묵의 암살자’라는 박인비의 별명처럼 한국 선수들 중에는 유독 포커페이스가 많다. 리디아 고는 한국인의 장점과 아버지의 체계적인 훈련 방법이 조화를 이뤄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그 역시 표정이 별로 없다. 조그만 일에도 화를 못 참는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와는 대조적이다. 

LPGA 투어에서 가장 일찍 연습장에 나가고, 가장 늦게 연습장을 떠나는 이들이 한국 선수다. 여기에 일부 선수들은 한 술 더 뜬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카펫이 깔린 복도나 실내에서 퍼팅 연습을 한다. 박세리도 중학교 시절 첫날 80대를 치고는 어둠이 내릴 때까지 연습장에서 볼을 때린 후 다음 날 스코어를 줄여 ‘베스트 아마’에 올랐다. 그러면서 선수들은 뚝심과 집중력을 스스로 체득한다.

YG엔터테인먼트에서 골프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위해 김효주가 소속된 지애드를 인수하고, 한연희 전 골프 국가대표를 영입해 본격적으로 주니어 육성에 나선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 골프군단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

 

구옥희 개척→박세리 질주→박인비 신기록  
태극낭자들의 LPGA 도전기


LPGA 투어 개막전부터 3월8일까지 5개 대회를 싹쓸이한 한국(계) 선수들은 미국 본토로 자리를 옮겨 우승 사냥에 계속 나설 것으로 보인다. LPGA 투어 우승은 박세리가 원조 격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개척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구옥희(1956~2013년)다. 1988년 구옥희가 스탠더드 레지스터 핑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한국 선수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후 1994년과 1995년에 고우순(51)이 도레이재팬퀸스컵을 2년 연속 제패했다.

3년간 우승 없이 공백기를 가진 한국은 1998년 박세리(38·하나금융그룹)가 ‘맨발 투혼’으로 US여자오픈에서 정상에 오르며 한국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미국 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박세리는 1998년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과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 등 4승을 거두며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 카리 웹(호주)과 ‘트리오 체제’를 형성했다. 박세리는 LPGA 투어에서 24승을 거두며 2007년 골프 명예의 전당에 가입해 한국 골프사를 새로 썼다.  

박세리의 ‘라이벌’ 김미현(38)과 박지은(36)이 가세하면서 LPGA 우승 레이스를 펼쳐나갔다. 2005년에는 ‘빅3’가 한 번도 우승을 못하는 동안 강수연(39)·장정(35) 등 8명이 1승씩을 거뒀고 2006년에도 역시 김미현·박세리가 다시 우승 맛을 봤다. 한국 최다승인 11승을 거뒀다.

‘세리 키즈’가 등장한 것은 2008년부터. 박인비(27·KB금융그룹)가 US여자오픈에서 정상에 올랐고, 지은희(29·한화)가 웨그먼스 LPGA에서 우승했다. 같은 해 LPGA 회원이 아닌 신지애(27)가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하는 등 3승을 올렸다.

한국 선수의 우승 행진은 이어졌고 2011년 유소연(25·하나금융그룹)이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면서 99승을 합작했다. LPGA 투어 100승의 주인공은 최나연(28·SK텔레콤). 2011년 10월16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C.C.에서 열린 사임 다비 대회에서 우승했다. 

2013년 박인비는 메이저 3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하며 63년 만에 LPGA 투어 역사를 새로 썼다. 뉴질랜드 교포인 프로 2년 차 리디아 고(18·고려대1)는 LPGA 투어에서 최연소 기록 행진을 벌이며 벌써 6승을 챙겼다. 지난해 한국 선수들은 LPGA 투어에서 10승, 교포들은 6승을 올렸다. 올 시즌 연승 행진의 분위기로 보아 이 기록이 깨질 가능성이 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