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장’의 레임덕 차단 전 방위 포석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3.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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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치밀하고 매서운 집권 3년 차 대규모 사정

‘5년 단임 대통령제’가 1988년부터 도입된 이래 대통령의 정국 운용에 하나의 정석이 생겼다. 취임 직후 대대적 사정(司正)에 돌입, 여야 정치권은 물론 관·재계와 사회 전체의 ‘군기’를 잡는 것이다. 6개월여의 사정 작업으로 ‘평정’되면 그 위세를 몰아 개혁 과제 이행 등 국정을 주도해나가는 수순이다.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사정 서슬로 미리 제거해 압도하는 전략이다. 이 과정에서 생계형 사범을 위주로 한 국민의 대사면 등 ‘당근’ 투여를 병행한다. 국민적 지지를 다지는 것이다. 

사정은 박수 받게 마련…지지율 회복 기대

이런 대단위 사정 ‘약발’도 집권 2년 차를 지나면 차츰 떨어진다. 임기 5년의 반환점을 곧 돌게 되면서 청와대가 가장 질색하는 ‘레임덕’ 그림자가 부쩍 다가서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집권 3년 차의 ‘2차’ 대규모 사정은 그래서 불가피하다. 이 단계의 채찍은 특히 중요하다. 자칫 빗나가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면 레임덕은 오히려 가속화된다. 한번 ‘시한부 정권’이란 낙인이 표출되면 백약이 무효다. 때문에 집권 3년 차에 이뤄지는 사정은 첫해의 그것보다 더 정교하고 치밀하고 매섭다.

박근혜 대통령은 3월17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부정부패 척결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대통령의 단호한 표정·어조에서 곧 불어닥칠 사정 태풍의 강도가 느껴진다. ⓒ 시사저널 이종현
정치권에는 ‘감히 대들지 마라’, 관계에는 ‘한눈팔지 마라’, 재계에는 ‘적극 협조하라’, 국민을 향해서는 ‘부패 척결을 위해 정부를 적극 지지해달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질 수 있는 게 사정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1993년)의 율곡 비리 수사 등 잇단 사정 드라이브로 93%에 가까운 전대미문의 국정 지지율을 기록한 바 있다. 대개 다른 정권 역시 최고 지지율은 집권 첫해에 기록했다. 반면 이명박(MB) 정부가 500만표라는 압도적 표 차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국정 주도권 장악에 실패하고 여당 내 ‘친박’과 야당에 끌려다닌 것은 취임 첫해의 사정에 실패한 탓이다. 광우병 파동과 촛불시위에 대한 안이한 대처로 사정 최적기를 놓침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

정치권에 대한 사정은 여와 야 투트랙으로 전개된다. 사실 사정의 칼날은 여권에 더 시퍼렇게 날아드는 경우가 많다. 야권 인사들에 대한 사정은 자칫 정치 보복이라는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다수의 여권 인물을 손본 다음 야권 관계자를 혼내는 게 대체적 수순이다.

여권에 대한 사정 역시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다. 하나는 취임 첫해의 사정이다. 이즈음의 주 사정 대상은 여권 내 비주류, 즉 반대파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새 정부의 가장 큰 적은 야당이 아니라 집권 세력 내부에 있어서다. 한때 같은 울타리에서 어울리던 이들이기에 달라진 상대의 힘과 권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맞먹으려’ 드는 행태는 위험천만하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정부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자신(반대파)들이 엊그제까지 우위에 있었기에 그런 경향이 강하고 당연히 새 정부에는 엄청난 부담이다. 따라서 한솥밥을 먹었던 옛 식구들에게 철퇴가 더 매몰차게 가해지는 것이다. 같은 줄기라고 할 수 있는 전두환-노태우, 노태우-YS, 김대중(DJ)-노무현 등으로의 정권 교체기 때가 YS-DJ, 노무현-MB 단계로 이어진 즈음의 정치권 사정보다 훨씬 더 살벌했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자신의 ‘주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유폐시키고, YS가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쿠데타 혐의로 구속시키고, 노무현 대통령이 DJ의 최대 업적으로 치부하는 대북 사업 관련자들을 줄줄이 구속시킨 것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불어닥치는 ‘포스코 비자금 의혹’ 등 박근혜정부의 사정 회오리가 이상득·박영준 등 MB 정부의 핵심을 겨냥한다는 관측에 별다른 이의가 없는 것과 흡사하다.  

각급 공안·감찰 기관은 물론 일반 행정 부처와 공기업 공직자들은 평소 각종 비리 자료를 차곡차곡 챙겨둔다. 그러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새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자료를 골라 제공하는 게 ‘일상화’됐다. 때문에 새 정부가 활용할 ‘사정 자산’은 숱하다. 이런 내부 고발 행진에 민간 부문이라고 빠지지 않기에 맷감은 더욱 풍성해진다. 여권 핵심은 물론, 검찰·경찰·국세청·감사원·국정원·금감원·공정위 등에는 자료가 쌓이고 그래서 대상을 ‘고르는’ 작업이 되레 고되다는 푸념 아닌 푸념이 관계자들에게서 나올 정도다. 이래서 ‘표적 사정’이 시비를 일으키고 청와대가 검찰을 ‘원격 조종’한다는 말이 나돌기도 한다. 

통상 집권 3년 차에 부는 전 방위 ‘2차 사정’이 매서운 배경에는 ‘자료의 질’도 크게 한몫한다. 집권 2년 동안 각종 자료가 보완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서다. 당연히 사정 칼이 더 잘 들게 된다. 이때 부는 사정 칼바람에 고개를 쳐들던 야당, 느슨해진 공직사회, 슬슬 딴전을 피우는 대기업 오너 등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는 이를 통해 축적한 에너지를 남은 집권 기간의 동력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2차 사정에서 주목할 주요 대상은 집권 세력 내부다. 다음을 겨냥해 ‘차기 행보’를 노골화하려는 잠룡들과 ‘미래 권력’에 눈길을 던지는 여당 의원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가 2차 사정에 짙게 담겨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 정부의 사정 칼끝이 자신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등을 겨냥하고 있다는 ‘일치’된 관측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4년 12월 측근들과의 송년 만찬에 참석한 이 전 대통령. ⓒ 시사저널 최준필
YS 정권 사정, 단임제 정부 정국 운용 ‘교본’

‘정치 9단’으로 통하는 YS의 사정은 단임제 정부 정국 운용 ‘교본’으로 통한다. 취임 이틀 뒤 자신과 가족 재산을 공개한 YS는 대대적 개혁과 부패 청산에 돌입했다. 하나회 장성 추방과 함께 지금의 방산 비리와 유사한 ‘율곡 사업’ 전면 감사를 통해 군 권력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대규모 사정 작업을 통해 권력 중추를 TK(대구·경북)에서 PK(부산·경남)로 완전 물갈이했다. 슬롯머신 사건과 관련해 이건개 대전고검장을 구속(현직 검사장으론 최초)시키는 등 서슬은 이어졌고,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를 통해 재벌들의 목덜미까지 움켜쥐었다. 집권 3년 차에 이뤄진 2차 사정에서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조사와 ‘5·18특별법’ 제정을 통한 전격 구속을 단행했다. 이는 단순한 사정을 넘어서는 가히 혁명적 조치였다. 취임 첫해 90%를 웃돌던 지지율이 3년 차를 맞으며 20%대까지 급락했으나, 4년 차에 들어서며 40%대로 회복한 것은 집권 3년 차에 이뤄진 일련의 사정·개혁에 힙입은 결과였다.

집권 3년 차에 진입한 DJ 역시,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연루된 전년도의 ‘옷로비 의혹’ 파동을 만회하기 위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개혁 시책을 계획했다. 그러나 홍업·홍걸 두 아들이 권력형 비리 혐의로 구속되면서 무위에 그쳤다. 3년 차의 지지율 반등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해(2000년) 초 38%였던 지지율은 하락을 거듭해 20%대로 임기를 마감했다. 검찰과의 갈등과 탄핵 소동까지 겪은 노무현 정부 역시 3년 차 사정·개혁 작업이 부실하기 마련이었고, 결국 20%대 지지율로 막을 내렸다. MB 정부는 집권 첫해의 혼란을 만회하기 위해 2년 차에 접어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 수사 착수 등 사정 포문을 열었으나, 노 전 대통령의 자살로 호된 역풍을 맞기도 했다. 그나마 집권 3년 차에 전개한 대대적 공직 사정 작업이 일부 주효해 40% 넘는 지지율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완구 총리(가운데)가 3월12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며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이 총리는 부정부패의 구체적 사례로 이명박 정부 당시 추진된 국책 사업을 예시했다. ⓒ 연합뉴스
“현 정권의 첫 대대적 사정이라 더 가차 없다”

지금 불어닥치는 박근혜정부의 사정 바람은 역대 다른 정부의 그것들과는 양상이 사뭇 다르다. 현 정부는 취임 첫해 총리·장관 후보자 낙마 등 잇단 인사 패착으로 대규모 사정 기회를 놓쳤다. 거기에 집권 2년 차에 터진 세월호 참사가 사정의 발목을 또 잡았다. 5년 임기 정권에서 전반기 2년의 허비가 함축하는 의미는 대단하다. 거듭된 실기(失期)는 치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연유 때문에 집권 3년 차에 처음으로 본격화되는 사정이 주목된다. 오히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대대적 사정인 만큼 그 대상·규모·강도 등 모든 면에서 사상 최대·최다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완구 신임 총리가 3월12일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예시한 ‘큰 부패’와 바로 이어진 포스코 등 다수 기업에 대한 수사 소식은 사정 쓰나미를 예고한다. 박 대통령이 곧이어 부패 척결을 독려하며 언급한 ‘뿌리 깊은 부패’란 단순한 기업 관련이 아닌, ‘MB 정권과 유착’된 것임은 모두가 꿰는 사실이다. 앞으로 전개될 부패와의 전쟁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통치 기반을 탄탄히 다지겠다며 2013년 7월 실장 취임 때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여야 정치권의 도전과 ‘문고리 3인방’에 의한 국정 농단 시비 등으로 청와대 체면이 구겨지면서 더욱 치밀하고 정교해졌다는 후문이다. 청와대가 검찰 등 권력기관의 영남 독식 비난 등에 아랑곳하지 않은 것도 이런 원려(遠慮)와 무관치 않다. 과거의 대검 중수부를 대신해 권력형 비리 수사를 전담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와 그를 통제하는 검찰 수뇌부, 그리고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라인업은 김기춘 전 실장이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일각에선 내년의 20대 총선과 경제 살리기를 위한 시간 벌기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사정 작업이 일정 수준·기일 내에 종료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인 관측은 그 반대다.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더 강하게, 광범위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방산 비리 관련 고위 장성 등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박 대통령 지지율이 40%대를 회복한 점에 주목하는 눈치다. 이런 부분도 고강도·전 방위 사정 드라이브를 점치게 하는 요인이고, 실제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

우려와 경계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강자에 대한 단죄가 국민들을 박수 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후폭풍도 간단치 않다는 얘기다. 특히 경제에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여지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런 지적은 ‘구린 자’의 여론 호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파묻혀 있다. 다양한 국정 경험에다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지금의 대대적인 사정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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