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함께 탄 사람들 지워지는 게 두렵다”
  • 이규대 기자·김지영 인턴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5.03.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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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난 ‘전우들’ 가슴에 묻고…천안함 생존 장병 4인 이야기

2010년 3월26일 서해 백령도 인근에서 해상경계작전을 수행하던 천안함이 침몰했다.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했다. 꿈 많던 젊은이들의 생때같은 목숨이 스러졌다. 58명의 장병만이 살아 돌아왔다. 이들은 숨진 동료들을 가슴에 묻은 채 ‘피격’의 트라우마와 싸워야 했다. 천안함 침몰 5주기를 맞아 이들의 삶을 조명했다. 대전·대구·부산 등에 거주하는 생존자 4명을 만나 지난 5년의 삶을 들었다. 그들이 견뎌야 했던, 또 앞으로 감당해야 할 상처와 아픔은 분단 조국의 비극적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차마 잊히지 않는 숫자가 있다. 이은수씨(26)는 그날을 ‘58’이라는 숫자와 함께 기억한다. “쉰여덟, 번호 끝.” 뭍으로 돌아온 인원을 셈한 결과다. 순간 이은수씨의 머리에 ‘104’라는 숫자가 스쳐 지나갔다. 숫자가 전하는 진실은 잔인했다. 함께 있던 대원 중 절반 가까운 이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엇갈린 자리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서 빨리 구조해내야 한다고, 왜 생존자를 더 찾아오지 않느냐고 외쳤다. 하지만 숫자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끝내 58이 끝번호로 남았다.

2010년 12월24일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희생 장병들이 묻힌 국립대전현충원의 ‘46용사 특별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첫 출동이었다. 2010년 1월 입대한 이은수씨는 갓 전입한 이등병이었다. 처음 탄 군함은 낯설고 어지러웠다. 경계작전 중인 배는 24시간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대원들은 3교대로 당직근무를 섰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3월26일은 2주간의 출동이 막바지에 이른 때였다. 이씨는 오후 8시까지의 당직근무를 마친 후 샤워를 하고 있었다. 오후 9시22분쯤, 갑자기 배가 출렁였다. 파도가 세게 치는구나 싶었다. ‘쾅!’ 돌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충격에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화장실 전등의 불이 나갔다. 배가 급격하게 기울면서 벽에 세차게 부딪혔다. 공황 상태에 빠진 이씨는 3분가량 멍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기름 냄새가 났다. 배 위쪽에서 “빨리 올라와”라는 외침이 들렸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밖으로 탈출했다.

사고 당시의 기억은 그에게 상당한 심리적 후유증을 안겼다. 갑작스럽게 큰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천둥·번개와 함께 정전이 돼 크게 놀란 적도 있다. 식은땀을 흘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화장실에 있을 때 몰래 불을 끄는 장난을 친 친구에게 크게 화를 낸 적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아직도 사고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 조성되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2010년 4월15일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 함미가 크레인에 올려져 바지선에 적재되고 있다. ⓒ 연합뉴스
큰 소리만 나도 심장이 벌렁거려

이은수씨와 동기인 전환수씨(27)도 당시가 첫 출동이었다. 함수 쪽에 있는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다 참변을 겪었다. 대다수 생존 장병은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은 데 반해 전씨는 바닥이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배가 급격하게 기울면서 화장실 맞은편 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배가 넘어가 벽이 바닥이 된 상황, 쓰러진 벽 쪽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전씨는 맞은편 방으로 떨어져 내리는 과정에서 왼편 검지 인대가 끊어졌다. 아직 장애가 남아 있으나 지내는 데 큰 불편은 없다. 버스 엔진 소리만 들어도 바짝 긴장할 정도였던 심리적 후유증도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고를 경계하는 습관은 만성이 됐다. 만약 여기서 사고가 난다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상상하곤 한다. 스스로 ‘조심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천안함이 그의 마음에 남긴 그림자다.

그들은 입대 후 두 달이 갓 지난 이등병 시절에 사건을 겪었다. 두 사람은 2011년 12월 전역하기까지 해군에서 복무를 계속해야 했다. 2010년 6월, 이들은 각기 다른 부대로 재배치를 받았다. ‘천안함 생존 장병’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자대에 적응하는 데 장애물이었다. 그들을 향한 부대원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은수씨의 말이다. “‘쟤는 천안함에서 사건 하루 당하고 두 달 넘게 편하게 생활하다 왔다’는 말을 들었다. 이등병 시절 3개월가량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이 아니꼬워 보인 것이다. 사건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받기도 했다. 그냥 일반적인 병사로서 군 생활을 하길 바랐는데 그러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은수씨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부대원들과 서로 마음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고 한다.

전환수씨는 좀 더 어려움을 겪었다. 첫 배치 부대에서는 간부들과의 관계에 잡음이 있었다. 손가락 부상을 치료하러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가야 했는데, 개인 정기휴가를 써서 다녀올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상부에 보고해 위로휴가를 받아 병원에 다녀왔다. 이후 간부들과 척을 졌다. 해당 부대에서 근무하기 힘들었다. 한 번 더 부대를 옮겼다. 이번에는 병사들과의 관계가 문제였다. “천안함 탄 게 무슨 자랑이냐” “여기에도 쉬러 왔느냐” 등의 얘기를 전입 첫날에 들었다. 버티기 힘들 정도로 복무 부적응을 겪었다. 한 상관이 같은 생활관의 병사들을 집합시켜 “천안함 생존 장병 잘해줘라”라는 훈계까지 하게 되자, 동료 병사들과는 완전히 등을 지게 됐다. 결국 한 번 더 부대를 옮겼다. 네 번째 자대에서 전역을 맞았다.

사고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가 상당하던 때, 이들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이중으로 괴로워해야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말한다. 자신들은 첫 출동이었기에 심리적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다고. 배를 오래 탔던 간부 및 선임병, 함께 바다 위에서 생활하며 끈끈한 유대를 맺어온 이들의 트라우마는 더욱 깊다는 것이다.

2010년 3월 당시 김정원씨(27)는 군 생활 2년 차 부사관이었다. 천안함이 소속됐던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의 특성은 ‘훈련보다 실전’이다. 북한 배가 자주 내려오는 지역이라 근무 강도가 셀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동료와의 우애는 돈독했다. 함장은 아버지, 선임 간부는 삼촌, 젊은 장병들과는 형·동생 사이라는 느낌으로 지냈다. 힘들지만 재밌었다. 해군에서 장기 근속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하지만 천안함 사건이 김정원씨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김씨는 다시 배에 오르지 못했다. 군 관련 행사에 참석해 탑승한 군함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떤 적이 있다. 예전처럼 배를 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김씨는 육상에서만 근무하다 2012년 12월 전역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대인기피증, 우울증, 삶 의욕 저하 시달려”

김씨는 군 복무를 이어가는 동안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대인기피증이 심했다. 친구를 만나지 못할 정도였다. “너는 동료들 떠나보내 놓고 그렇게 멀쩡히 다니느냐”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새로 옮긴 부대에서도 동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혼자 사무실에 앉아 주어진 행정 업무만 처리하는 식이었다.

2011년까지 이런 증상이 이어졌다.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감정이 예민해졌고 자주 욱했다. 멍할 때도 많았다. 운전을 하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억이 안 나기도 했고, 어떻게 도착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제대로 된 심리 치료를 받지 못했다. 군 병원은 실망스러웠다. 생존 장병들의 정신적 외상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군의관들을 믿을 수 없었다. 대뜸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다. 당장 아픈 곳은 없지만, 혹시나 있을 정신적 외상이나 앞으로 발생하게 될 건강상의 문제가 우려돼 왔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도대체 왜 왔느냐는 답이 돌아오는 식이다. 군 병원에 가지 않게 됐다.” 민간 병원의 비싼 진료비를 감당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현재 전역한 생존 장병들의 심리 진단·치료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없다.

김씨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죄책감에 시달린다. 살았다는 것이 미안하다. “사건 이후 6개월 동안 유가족들을 자주 만났다. 나와 친했던 동료 유가족 전부 뵙고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한 가족께서 하시는 말씀이 ‘넌 살았지만 내 아들은 죽었구나’라는 취지로 들렸다. 그 뒤로는 유가족들을 못 보겠더라.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서다. 우연한 자리에서 유가족을 뵙게 되면 그냥 손을 잡고 죄송하다는 말만 하염없이 되풀이한다.” 사망자 중에는 그의 중학교 동창도 있었다. 사건 발생 20여 분 전까지 그와 같이 있었다. 상황 당시 안전순찰근무를 하다 변을 당했다. ‘친구를 왜 그때 잡지 않았을까.’ 그는 후회한다. 친구를 포함해 함미에 있던 장병 대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김씨는 “만약 그 당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때리고 오든 끌고 오든 함미의 대원들 모두를 함수로 보내고만 싶다”고 말했다.

‘천안함 생존 장병 1호 전역자’ 전준영씨(31)는 사고 직후 ‘천안함전우회’ 총무를 맡았다. 생존자들 모두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구심점 역할을 한다. 전씨는 “생존 장병 모두가 짧게는 1~2년, 길게는 그 이상으로 심각한 심리적 후유증을 겪었다. 대인기피증, 우울증, 삶 의욕 저하 등이 대표적이다. 나 같은 경우도 대인기피증·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특히 아직 현역으로 복무 중인 이들은 후유증을 겉으로 드러내는 게 더욱 어렵다. 가슴속에 쌓아두고 있다”고 말했다.

먼저 간 동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생존자들의 삶을 채우고 있다. 전준영씨는 “기억이 없어지는 게 두렵다. 함께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자주 하던 말, 습관과 버릇, 서로 나눴던 농담 같은 것들이 조금씩 잊히는 게 싫다. 그래서 사고 당시를 많이 생각하려 한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천안함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김정원씨는 “너무 힘들 때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행동으로 옮기려는 순간, 먼저 죽은 대원들이 생각났다. 이렇게 죽어 하늘에서 만나게 되면 그들 앞에서 할 말이 없겠다 싶었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네 몫까지 정말 열심히 살고 왔다고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존 장병 대다수가 피해의식 안고 살아

5년이 지났다.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다. 생존 장병들을 괴롭혔던 후유증도 어느 정도 진정됐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3월’을 앓는다. 매년 3월26일 전후로 사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뒷맛이 씁쓸하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다들 가는 군대라고 하면서 왜 나만 남들과 다르게 정신적 상처를 안고 돌아와야 했는지 억울할 때가 있다. 전준영씨의 말이다. “보통 군 복무를 마치면 꿈과 희망을 갖고 새 출발을 하지 않나. 우린 그럴 수 없었다. 후유증과 싸워야 했다. 그로 인한 박탈감·피해의식이 있다. 이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이 국가의 충분한 예우다. 그런데 지금 생존 장병 대다수가 그런 면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김정원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상받은 것은 천안함재단에서 준 위로금 500만원, 매년 장학금으로 지급받는 돈 100만원 정도다. 이것도 국민 성금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가 내게 실질적으로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어떻게 힘들어했는지,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는 관심조차 없다. 사건 직후 안 본 계급장이 없다. 포스타(대장)며 스리스타(중장)며 장·차관이며 다 봤다. 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 있다. ‘너희는 영웅이다.’ 우리나라의 영웅 대접은 이런 것인가.”

이은수씨는 자신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져보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무래도 억울하다. 모두들 젊은 나이에 이런 일을 당했다. 남들과는 다른 일을 겪으며 상처와 아픔을 갖게 됐다. 이런 것을 국가가 너무 방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필요할 땐 집어넣어 놓고, 필요 없어지니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라고 하는 느낌이다.”

국가를 위한 희생, 국민의 안전을 위한 헌신. 추상적인 가치들은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지탱해주기에 여러모로 부족해 보인다. 먼저 떠난 동료들을 가슴에 묻은 채, 천안함 생존 장병들은 자기 자신과 대한민국 사회를 향해 묻고 있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닌, 가야만 함을 감수해야 하는 징병제 국가의 전상자(戰傷者)들은, 자신이 겪은 심리적 상처를 과연 무엇으로부터 보상받아야 하는 것일까.

“하필이면 이 노래네요.” 천안함전우회 총무 전준영씨와의 인터뷰 말미에 대화가 잠시 멈췄다. 가수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가 카페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잠시 끊겼던 대화가 이어진 뒤에도 노래는 계속됐다.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3월, 가객(歌客)의 열창이 먹먹한 여운을 자아내고 있었다. 전준영씨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마음의 상처’는 국가유공자 인정 안 돼 


58명의 천안함 생존 장병들은 대부분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지 못했다. 현행 보훈심사에서 상이등급을 받기 위한 조건은 ‘치료 종료 후에도 남는 후유증과 장애 정도’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는 사실상 보상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심각한 육체적 상처를 입은 신은총 하사 등 소수를 제외하면 2~3회 이상 신청서를 접수하고도 줄줄이 탈락했다. 전환수씨(27)는 “똑같은 전투를 치른 유공자인데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공을 치하하지 않는다는 게 아쉽다. 판정 기준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은수씨(26)는 “사고 직후 천안함 장병들 모두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말뿐이었다”고 전했다.

공무상 인과관계와 현재의 장애 상태에 대해 신청인이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절차도 이들에겐 곤혹스럽다. 김정원씨(27)는 “국가유공자가 되는 기준이 ‘외상’이다. 우리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증명하라고 한다. 정신적·심리적으로 힘든 것을 어떻게 겉으로 보여주나”라고 항변했다. 전준영씨(31)는 “마음병은 육체적인 상처보다 훨씬 병원을 찾는 것을 어렵게 한다. 내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고통이 앞으로 언제 어떻게 재발할지 몰라 두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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