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은행은 ‘히든 패배자’ 양성소인가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5.03.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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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엘 등 문제 기업에 혈세 ‘펑펑’…히든챔피언 제도에 구멍

한국수출입은행은 2009년부터 히든챔피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될성부른’ 중견기업을 집중 육성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취지에서다. 지난해 말까지 히든챔피언 인증을 받은 곳은 모두 23곳이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5위 이내이거나 매출이 1조원 이상인 초우량 기업이 대부분이다. 후보 격인 육성 대상 기업까지 합치면 300여 곳에 이른다. 이들 기업은 대출을 받을 때 금리나 한도에서 혜택을 받는다. 코트라·증권거래소 등 유관기관으로부터 상장, 해외 진출을 위한 컨설팅이나 법적 자문을 받을 수도 있다. 히든챔피언으로 지정되면 정부로부터 특별 대접을 받는 것이다. 

2014년 12월 히든챔피언 기업인 모뉴엘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모뉴엘은 2007년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인 CES에 참석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모뉴엘 같은 회사를 주목하라”고 말했다. 모뉴엘은 주력 제품인 로봇청소기와 홈시어터 PC를 가지고 창업 10년 만에 매출 1조원대를 돌파했다. 2011년에는 국내 최초로 ‘한국형 히든챔피언’에 선정됐다. 기대가 컸던 만큼 모뉴엘의 법정관리 신청 여파는 컸다. 회사의 수출 실적만 믿고 거액을 대출해준 주요 은행은 5500억원 상당의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모뉴엘을 적극 지원했던 수출입은행 역시 1300억원 상당의 신용대출을 해줬다가 돌려받지 못하게 됐다. 이 은행은 국책은행이라 국민 혈세를 그만큼 날린 셈이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수출입은행. ⓒ 시사저널 최준필
모뉴엘·우양에이치씨 등 잇달아 부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모뉴엘의 수출 실적 돌려막기와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났다. 저가의 홈시어터 PC를 고가인 것처럼 부풀려 해외에 수출한 후 수출대금 채권을 금융기관에 매각해 수조 원 상당을 대출받는 수법이었다. 수출대금 채권의 상환 기일이 다가오면 또 다른 허위 매출을 일으켜 대출 돌려막기를 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금융조세조사2부는 박홍석 모뉴엘 대표 등 전·현직 임직원 4명을 기소했다. 검찰은 모뉴엘의 대출사기를 눈감아주고 수억 원을 수수한 한국수출입은행 비서실장과 해외 사무소장 등 9명도 기소했다.

모뉴엘 사건을 계기로 수출입은행의 히든챔피언 제도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이 일었다. 금융감독원은 2014년 11월부터 수출입은행이 히든챔피언으로 인증했거나 육성 대상으로 선정한 기업에 대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수출입은행은 여신 심사나 사후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은 “모뉴엘의 대출사기로 1300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며 “여신 심사 인력을 늘리고, 대출 기업의 현금 흐름이나 이상 징후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 행장이 대책 마련을 밝힌 지 2개월가량 흘렀다. 그런데 코스닥 상장사인 우양에이치씨가 지난 3월 최종 부도 처리됐다. 이 회사 역시 2013년 수출입은행의 히든챔피언 육성 대상 기업에 선정됐다. 주요 은행이 우양의 부실을 우려해 대출을 회수했지만,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은 우양에이치씨에 각각 247억원, 174억원을 추가로 대출해줬다. 우양에이치씨의 자금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면서 두 은행은 대출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됐다. 우양에이치씨가 최종 부도 처리되기 일주일 전에야 부랴부랴 히든챔피언 육성 대상 선정을 취소할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다.

수출입은행 측은 “기업의 분식회계까지 은행이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변명한다. 이 은행 관계자는 “히든챔피언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업 자체는 나쁘지 않다”며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선정 기업의 경영 상황이 일시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분식회계 문제는 히든챔피언 선정 기업과 은행, 금융 당국, 정부가 합심해 풀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형 히든챔피언 제도에 허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히든챔피언 육성 대상 기업은 현재 267곳이다. 이 중 여러 기업이 2011년 이후 실적이 악화됐다. 조사 대상 기업 267곳 중 93곳(34.8%)의 2013년 매출이 감소했다. 올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형 히든챔피언에 선정된 23개 기업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시사저널은 이들 기업의 명단을 넘겨받아 최근 5년간의 실적과 주가를 조사했다. 2014년 실적을 올해 발표했거나, 실적 추정치가 공개된 곳은 모두 18곳이다. 이 중 8곳(44.4%)의 지난해 매출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에스맥 등 일부 기업은 매출이 반 토막 났고, 그 여파로 적자 전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부도가 난 모뉴엘을 포함할 경우 히든챔피언에 선정된 기업의 절반이 올해 실적이 하락했거나 부도가 난 셈이다. 주가도 마찬가지다. 상장 기업 18곳 중 5곳(27.7%)의 주가가 코스피(20.30%)와 코스닥(19.22%) 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태평양물산·동진쎄미캠·드림텍 등은 히든챔피언에 선정된 후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적자 전환됐다.

한국형 히든챔피언 제도가 잇따라 잡음을 내면서 제도 개선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모뉴엘 대출사기 및 금융권 로비 사건에 대해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 연합뉴스
히든챔피언 기업 50%, 2014년 실적 하락

전문가들은 한국형 히든챔피언 제도의 개선을 주문한다. 오제세 의원은 “수출 중소·중견 기업 육성을 위해 히든챔피언으로 선정한 기업 중 상당수가 경영난을 겪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수출 기업들이 강소기업이 될 수 있도록 제도 정비와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수출입은행은 2003년 이후 금융 당국으로부터 한 번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 수출입은행이 금융기관임에도 기획재정부 산하라서 금융감독원은 제재할 권한이 없었다. 히든챔피언 제도를 둘러싼 비리와 관리 부실이 최근 잇따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모뉴엘 사태 때 수천억 원 규모의 사기 대출이 발생했고, 은행 임원들이 수억 원의 뇌물을 수수했음에도 수출입은행은 금감원 제재 대상에서 제외됐다”며 “수출입은행을 금융위원회 산하로 이관해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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