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1. '이순신의 후예'라 자처하다니 부끄럽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4.0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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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의 군인정신 온데간데없는 해군 수뇌부의 비리 백태

군인 이순신에게 가장 큰 불행은 선조 같은 인물이 생사여탈권을 쥔 군 통수권자였다는 점이다. 왕조 국가에서 군부(君父)로 불리는 임금이었지만, 선조에게는 군(君)의 엄격함도, 부(父)의 자애로움도 부족했다. 오히려 능력 있는 아랫사람을 시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조는 재위 30년(1597년) 3월13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비망기는 승지에게 전하는 사건 처리 지침서다. 선조가 비망기를 내린 이유는 이순신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조정을 속인 것은 임금을 없는 것으로 여긴 죄(無君之罪)이며, 적을 놓아주고 토벌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다.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는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거리낌 없이 행동한 죄(無忌憚之罪)다. 이렇게 수많은 죄상이 있으면 법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해서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인신으로서 속인 자는 반드시 죽여서 용서하지 않아야 한다.”(<선조실록> 30년 3월13일) 이순신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보고하라는 비망기였다.

‘명량대첩’을 다룬 영화 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적장 말만 믿고 이순신 제거 나선 조정

선조가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서 용서하지 않아야 한다’고 단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상의 명분은 이순신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체포를 방기했다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대마도 좌하촌(佐賀村) 출신의 요시라(要時羅)를 이중간첩으로 삼아 조선 진중을 교란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적의 장수 고니시가 그의 졸병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진영에 자주 드나들도록 하여 은근한 정을 보였다”라고 말했는데, 김응서는 요시라의 주선으로 함안(咸安) 곡현(谷峴)에서 고니시와 이른바 함안회담을 갖기도 했다. 요시라는 그 대가로 벼슬을 요구했고, 김응서는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의 벼슬과 은자(銀子) 80냥을 주었다. 요시라가 “가토가 건너올 때 가르쳐줄 테니 제거하라. 고니시도 이를 원하고 있다”는 정보를 주면서 이순신은 위기에 빠졌다. 이순신은 이것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요시라의 술책임을 단번에 파악했지만, <이충무공 행록(行錄)>에서 “이때 조정은 원균의 말만 믿고 공(이순신)을 비방해 마지않았으므로 공은 요시라의 말이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마음대로 물리칠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는 와중에 가토가 장문포(場門浦·거제도)에 정박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공격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김응서는 고니시가 했다는 “그대 나라 일은 매양 그러하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내가 전에 한 말이 가토의 귀에 들어갈까 우려되니 비밀을 지키라”는 말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어이없게도 조정에서는 적장 고니시가 마치 조선 장수라도 되는 듯이 그의 말만 믿고 이순신을 비방하고 나섰다. 선조는 이 사건을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선조는 ‘비망기’를 내리기 한 달 전에 이미 김홍미에게 전교를 내려 ‘선전관을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에게 비극이 가중된 것은 서인들까지 전쟁 영웅 사냥에 가세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였으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몹시 공격했다”(<징비록>)고 말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조는 ‘비망기’를 내리기 두 달 전인 그해 1월 “그런 사람(이순신)은 비록 가토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선조실록>30년 1월27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이순신이 요시라의 말을 듣고 움직였든, 움직이지 않았든 이미 이순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전 우의정 정탁(鄭琢)이 일흔이 넘은 노구로 “이순신이 이미 한 차례의 고문을 당했으므로 만일 또다시 형을 가한다면 반드시 생명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구원에 나서면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요시라를 통해 이순신을 무력화시킨 고니시는 같은 전술을 원균에게도 사용했다. 원균 역시 “고니시와 요시라가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선조와 원수 권율의 압박에 못 이겨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 30년(1597년) 7월15일 원균은 조선 수군 전부를 이끌고 절영도 전투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그는 거제도 칠천량(漆川梁)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에 의해 전사했고, 전라좌수사 이억기도 전사하고 말았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겨우 한산도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이순신이 체포된 지 5개월 만에 조선 수군은 궤멸한 것이다.

‘수군 해체’ 선조 명령에 피를 토하듯 반대

일본군은 임진년 이래의 숙원이던 제해권을 장악했고 보급로도 확보했다. 다급해진 선조는 7월22일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로 재임명했다. 그러나 선조는 수군을 해체하려고 마음먹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 8월15일자에서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가져온 선조의 유지(宥旨)를 받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토로하고 있는데, 선조의 유지란 ‘조선 수군을 철폐하고 이순신을 육군으로 발령 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수군 철폐론에 대해 이순신은 피를 토하는 장계를 올렸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장계였다. 이순신은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다행한 일로서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설령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신(微臣)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이충무공전서> ‘행록’)라고 피를 토하듯 반대했다.

부산 본영의 일본군 전선 600여 척을 12척의 전선으로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일본군은 이순신이 전력을 보강하기 전에 끝장내기 위해서 총공세를 펼쳤고, 드디어 9월16일 명량해협에서 양군은 충돌했다. 이순신은 하루 전인 15일 여러 장수에게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했다”면서 “한 사내가 오솔길의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를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독려했다. <난중일기>는 이렇게 시작된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330척, 조선 수군은 13척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순신은 부족한 전선 수를 보충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험(天險)의 지형에 급조류가 흐르는 명량해협의 울돌목으로 일본 수군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싸우는 시간까지 이순신이 정할 수는 없었다. 이민서(李敏徐)가 찬(瓚)한 ‘이충무공 명량대첩 비문’은 ‘함대가 바다의 좁은 입구에 도착하자 전선을 펼친 후 닻을 내려 바닷물을 가로막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투는 조류가 조선 쪽으로 흐르는 불리한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이 비문은 또 ‘적들은 상류에서 조류를 타고 바다를 가렸으니 그 기세는 산을 누르는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통영함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가운데)이 3월2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해참총장 등 장성 6명 방산 비리로 구속

대장선에 오른 이순신은 지자포·현자포 같은 총통을 쏘면서 전진했지만 다른 장수들은 뒤로 물러나서 관망했다. 이순신이 다른 장수들에게 결사항전을 독려하며 수십 척 배의 일본군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어 효시했는데,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 ‘마다시의 머리를 베어 돛대 꼭대기에 매달자 장병들이 분발하여 적을 추격했다’고 전한 것처럼 전세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순신은 다시 승리했고 제해권을 되찾았다. 일본군의 재침 기본 전략인 수륙병진 작전도 폐기되었다. 

그로부터 308년 후인 1905년 5월26일,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동해에서 ‘군신(軍神)’ 이순신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리고 “황국의 부흥과 몰락이 이 한 번의 전투에 있다”고 결의한 다음 날,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승축하연에서 도고 헤이하치로는 “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유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순신 제독에 비유하는 것은 감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사양했다고 전한다. 자신과 넬슨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전투에 나섰지만, 이순신은 음해하는 세력이 숱한 상황에서도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 해군까지 신으로 모시는 이순신의 후예를 자처하는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상황은 길 잃은 난파선을 보는 듯하다.

정옥근·황기철 두 전직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해 6명의 장성이 방산 비리로 구속되었고, 한 장성은 캐디 성희롱 혐의로 보직해임을 종용받고 있지만 버티는 중이라고 한다. 천안함 피침 5주년을 맞아 그 함장은 북한 소행이라는 군의 발표를 믿지 않는 국내 일부 세력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북한의 공격으로 46명이 수장되었으면 함장은 무죄라는 논리인가.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한국 해군에는 예외인 것일까.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다”는 결사의 군인정신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오늘날 군 수뇌부의 정신 상태를 이순신의 군인정신으로 개조하는 길만이 해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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