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부부’ 비자금이 1000억?
  • 이승욱·김지영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04.0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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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비서 김현탁씨 ‘680억 비자금’ 고발 박 전 장관 “차명 자금 없다”

지난 3월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품에는 두툼한 누런색 서류 봉투가 안겨 있었다. 이 남성은 대기 중이던 취재진에 “진실을 밝히러 왔다”고 말하고는 청사 안으로 들어가 고발장을 접수했다. ‘6공화국 황태자’였던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의 은밀한 비자금을 둘러싼 의혹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검찰에 박 전 장관의 차명 계좌 등 비자금 의혹을 고발한 중년 남성은 박 전 장관 곁에서 20년 동안 수행비서로 일했다고 주장한다.

박 전 장관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노태우 정권 시절까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회자될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가졌던 권력 2인자였다. 그런데 박 전 장관이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이후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거액 비자금 보유 의혹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졌다.

이번 20년 지기 측근의 고발 사태가 박 전 장관의 차명 계좌 자금 등 그동안 제기된 수백억 원대 비자금 의혹을 규명할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철언 전 장관 ⓒ newsis
“김씨, 단순 심부름꾼이라 보긴 힘들어”

박 전 장관의 전 수행비서였다는 김현탁씨(51)는 3월23일 고발장과 보도자료 등을 통해 “박철언 전 장관과 부인 현경자 전 의원이 차명 계좌를 이용해 조세법 및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하게 됐다”며 “박 전 장관 부부가 친인척과 직원을 동원해 지난 30년간 차명 계좌로 예금 관리를 해왔다”고 폭로했다.

그는 또 “박 전 장관은 16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 사업 등 재산 증식과 관련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국회의원 신분 시절) 마지막 공직자 재산 신고액 25억원의 수십 배가 넘는 재산을 갖고 있다”며 “이 자금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주장하는 박 전 장관의 차명 자금 규모는 박 전 장관 358억원, 현 전 의원 323억원 등 총 680억여 원에 이른다. 

김씨의 차명 계좌 폭로에 대해 박 전 장관은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는 특히 김씨 주장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박 전 장관은 3월2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1990년 체육청소년부장관으로 갔을 때 공식적인 비서가 아니라 보조 업무를 하면서 심부름을 한 사람이었다”면서 “그 사람이 내 비서 내지 수행비서를 20년 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나와 집사람(현경자 전 의원)은 은행에 안 가고 전부 사람을 시켜서 업무를 봤는데 그 일을 시킨 사람 중 김씨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자신과 가족의 자금 거래 전반을 인지할 만한 수행비서로서의 격은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김씨와 함께 일했던 한 인사는 김씨의 위상에 대해 박 전 장관과는 다른 시각을 보였다. 박 전 장관을 국회의원 시절 보좌했던 전 직원 A씨는 “김씨가 박 전 장관을 처음 만났을 때는 체육청소년부의 공무원 신분이었던 것으로 안다”며 “그런 김씨가 박 전 장관이 그만두자 공무원 신분을 버리고 박 전 장관을 모셨는데 후에 김씨는 ‘박 전 장관을 믿고 인생의 모험을 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A씨는 또 “박 전 장관이 김씨를 단순히 심부름을 한 사람 정도로 말한다고 하지만 역할이 적은 인물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박 전 장관의 측근이었던 B씨도 “김씨가 처음 볼 당시 다소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박 전 장관에 대한 충성도는 누구보다 높았다”고 회상했다.

박 전 장관의 차명 계좌를 둘러싸고 측근 인사의 폭로가 있었던 것은 김씨가 처음이 아니다. 박 전 장관은 2008년 초 H대 무용과 강 아무개 교수(여)와 강 교수의 부탁을 받고 차명 계좌를 개설해준 은행 지점장 등을 자신이 맡겨놓은 170여 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고발한 바 있다.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수행비서로 일했던 김현탁씨가 “박 전 장관 부부가 차명 계좌로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관리했다”며 3월23일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접수하러 가고 있다. ⓒ 연합뉴스
박철언 측근 7년 전에도 비자금 폭로

당시 강 교수의 횡령 사건과 맞물려 김씨의 주장과 유사한 전직 보좌관의 폭로가 있었다. 김 아무개 전 보좌관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박 전 장관의) 차명 계좌를 모두 합치면 1000억원대에 이를 것”이라며 “박 전 장관이 부인하면 통장과 수표 사본, 도장, 자금 인출 날짜, 전달한 날짜가 적힌 메모 등을 검찰과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오히려 “김 전 보좌관이 은행 심부름을 하면서 100억원대 돈을 횡령했다”고 맞받아치면서 진실 게임으로 비화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슬롯머신으로 구속된 후) 1994년 9월 출옥한 뒤 정리차 계좌를 확인해보니 계좌 대부분이 분실계를 내고 찾아간 깡통 통장이었다”며 “당시 미국으로 출국했던 김 전 보좌관을 찾아가 물어보니 눈물을 흘리면서 죄송하다고만 했다. 자기가 심부름을 시켰던 법무사가 다 빼돌렸다면서 김 전 보좌관이 10억원을 반환했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최근 검찰에 고발한 680억원대의 차명 계좌 자금과 김 전 보좌관이 2008년 당시 폭로한 비자금이 동일한 것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씨가 고발한 차명 계좌 자금 680억원과 여교수가 횡령한 것으로 밝혀진 176억원이 무관하다면, 소송과 폭로로만 드러난 박 전 장관 부부의 차명 자금은 800억원대에 이른다.

김씨의 고발로 2008년 강 교수와의 소송 이후 드러났던 차명 자금의 처리 문제도 다시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됐다. 박 전 장관은 2008년 자신의 자금을 관리했던 강 교수 등으로부터 법원의 강제조정 절차를 통해 176억원 중 64억원을 받아냈다. 강 교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징역 4년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박 전 장관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박 전 장관은 이후 차명 계좌 보유로 인한 세금 누락 부분을 신고했고, 이를 토대로 국세청은 1차 3억2000만원, 2차 3400만원의 세금을 부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씨는 “박 전 장관이 지인 6명의 이름으로 누락 신고를 했지만 실제 모든 자금은 박 전 장관 한 사람 것”이라며 “(박 전 장관이) 국세청에 자진신고를 했을 때도 6명의 이름으로 신고해 세금이 축소 추징됐다”고 주장했다.

박철언 “포상금 노린 것, 배후 인물 있다”

검찰은 김씨의 고발장 접수 후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에 배당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2008년 강 교수 횡령 사건과 측근들의 비자금 폭로 당시의 수사와 마찬가지로 비자금 의혹 전반에 대한 규명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치자금법과 특가법상 뇌물 혐의 공소시효가 지나 비자금 성격과 조성 경위 등의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박 전 장관이 불법 자금 조성 과정에서 법적 책임은 비껴갈 수 있지만 불법 차명 계좌 운용 등과 관련한 법적 처벌은 유효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씨가 박 전 장관을 고발하면서 “금융실명제의 새로운 법이 발효된 2014년 11월29일 이후에도 차명 계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힌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후 그동안 차명 계좌 사용이 적발되더라도 계좌 실소유자와 계좌 명의자가 합의한 차명 거래에 대해서는 별도로 처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29일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일부 예외 조항을 제외하면 쌍방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불법 행위 목적으로 차명 계좌를 보유할 경우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 차명 계좌의 실소유주와 차명인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2008년 강 교수 횡령 사건 때까지 정리하지 못했던 차명 계좌를 이후 다 정리했기 때문에 차명 계좌는 없다”고 말했다. 차명 계좌가 일부 있긴 했지만 2008년 소송 이후엔 운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검찰 수사는 금융실명제법이 강화된  2014년 말 이후 박 전 장관이 차명 계좌를 보유하거나 운용했는지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씨가 수행비서 일을 그만둔 후 최근까지도 박 전 장관과 교류해온 점이 눈길을 끈다. 앞서 언급한, 박 전 장관의 전 직원 A씨는 “김씨가 공식적으로 박 전 장관의 수행비서 일을 그만둔 후에 만났을 때도 여전히 박 전 장관의 은행 심부름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박 전 장관도 “(김씨가) 지난해 11월까지도 가끔 우리 사무실에 들러 (나와) 얘기도 하고 밥도 먹고 잘 지냈는데 11월 이후에 표변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박 전 장관의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를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검찰에 고발했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김씨가 검찰에 박 전 장관 부부를 고발하기에 앞서 관련 의혹이 지난 1월부터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점도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김씨 외에도 박 전 장관의 부인 현 전 의원의 동생인 현 아무개씨도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차명 계좌 리스트와 계좌번호, 비자금 액수 등의 자료를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박 전 장관은 “세법이 개정되면서 지난해 11월29일부터 차명 계좌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게 돼 있다”며 “포상금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이번에 고발한 배후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포상금을 받아서 (김씨와) 나누자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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