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명’ 받은 ‘포도대장’ 권력 추를 흔들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04.09 16:4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완구 총리에 부쩍 힘 실려…친박 주류 전열 정비하고 주도권 잡기

“요즘 정국은 사실상 이완구 총리가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엔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실려 있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청와대가 이 총리 개인에 대해 지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친위 그룹의 전열 정비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관료 출신이면서 친박 주류로 분류되는 한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사정 정국에 대해 내린 해석이다. 이 총리가 외견상 ‘실세 총리’ 행보를 보이는 건 박 대통령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지만, 이는 집권 3년 차를 맞아 청와대와 친박 주류 진영의 국정 주도력을 키우려는 박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얘기다.

지금 많은 사람은 친박 주류의 핵심으로 이완구 총리를 지목한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이른바 ‘박심(朴心)’이 가장 많이 쏠려 있다고 평가받아온 사람은 누가 뭐래도 최경환 경제부총리였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이가 적지 않고, 이미 역전됐다는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 총리의 입지는 박 대통령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계속 넓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한 친박계 핵심 의원은 “지난해에 정상적으로 경선을 치렀으면 당내 기반이 약했던 이 총리가 원내대표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이주영 의원을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이완구 원내대표 단독 추대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2월17일 박근혜 대통령과 이완구 국무총리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위해 회의장에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정’ 이완구 급부상…친박 주류 전열 정비

이 총리의 발탁 과정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완구 총리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박 대통령이 이 총리를 지명한 건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콘크리트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때다. 이 총리 자신조차 지명 발표 전날 밤에 연락을 받았을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이 총리가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사정 정국을 주도하고 나선 시점도 공교롭다. 김무성 대표에 이어 유승민 원내대표까지 새누리당의 ‘투톱’을 비주류가 차지한 후 당·정·청 관계의 중심축을 당으로 옮겨가려는 움직임이 현실화하던 때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이 이 총리를 통해 국정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했다. 특히 이 총리의 정치적 역할과 비중이 커지는 과정은 실질적으로 친박 주류가 전열을 가다듬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난해 말 정윤회 문건 파문이 불거진 뒤 비선 실세 논란으로 여권 전체가 홍역을 앓았고, 곧바로 연말정산 ‘세금 폭탄’ 논란으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율은 동반 급락했다.

이 총리가 사정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한 지난 3월부터 청와대와 친박 주류가 수세 국면에서 벗어나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친박 주류와 비주류 간 긴장감도 점차 뚜렷해지는 분위기다. 지난해 19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후보 경선과 7·14 전당대회, 올해 2월 원내대표 경선 등에서 잇따라 패배하며 두문불출했던 친박 주류는 최근 들어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등을 두고 비주류 당 지도부와 공개적으로 각을 세우고 있다. 김무성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이 총리가 다소 뜬금없이 사정 칼날을 휘두르고, 청와대가 비판 여론을 무릅쓴 채 현역 의원들을 정무특보에 대거 임명하는 등 최근 일련의 상황들은 다분히 기획된 듯한 모습”이라며 “지금도 박 대통령 주변에서는 ‘나를 따르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혀를 찼다.

이 총리가 주도하는 사정 칼날의 한쪽 끝이 자원외교 비리 의혹에 맞춰진 만큼 언제든 ‘친이계’가 타깃이 될 가능성은 열려 있는 상황이다. 포스코 등 대기업 비리 수사 역시 정·관계 로비 쪽으로 초점이 옮아가면서 정치권 전체를 뒤흔들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새누리당 내 ‘현실 권력’을 향할 수도 있다. 사실상 청와대와 친박 주류가 전열을 정비하는 수준을 넘어 국정의 주도권을 확보했다는 해석이 그래서 나온다.

2월2일 최경환 경제부총리(오른쪽)가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출 투표를 마치고 유승민 의원에게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조기 점화된 ‘포스트 박근혜’ 무한 경쟁

친박 주류의 전열 정비가 이완구 총리에게 힘이 실리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는 건 이 총리가 명실상부한 권력 실세가 됐음을 의미한다. 이는 친박계 내부의 무게 추가 일방적으로 최 부총리에게 쏠려 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을 예고한다. 당장 친박 주류 내부에서 박 대통령 이후를 겨냥한 경쟁이 시작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양상은 여권 전체로 범위를 넓혀서 해석해볼 수 있다.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김문수 당 보수혁신특위 위원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홍준표 경남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그간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돼온 대다수 여권 인사가 온통 비주류라는 점에서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 총리와 최 부총리가 친박 주류의 ‘대표 선수’ 자격으로 대권 주자 그룹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포스트 박근혜’를 향한 여권 내 무한 경쟁이 본격화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특히 박 대통령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는 이 총리의 등장이 이를 촉발시켰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당장 친박 그룹 내에선 최 부총리 측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 친박계 재선 의원은 “박 대통령이 우리 (친박계) 내부에서도 경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솔직히 그동안에는 최 부총리가 좌장 역할을 해왔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최 부총리가 이 총리와 친박계 대권 후보 자리를 놓고 정면으로 맞붙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최 부총리 주변에선 그가 내년 4월 총선에서 4선 고지에 오른 후 7월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노릴 것이란 얘기가 들리고 있다. 사실상 박 대통령 퇴임 이후까지 내다보는 행보다. 한때 친박계 핵심이었다가 지금은 박 대통령과 다소 껄끄러워진 진영 의원과 유승민 원내대표가 당권·대권을 놓고 의기투합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의 핵심 측근 그룹이 적잖이 겹치는 것과 무관치 않다. ‘원박(원조 친박)’이었던 두 사람이 친박계를 다시 접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비주류 중진 의원은 “박 대통령이 고심 끝에 내놓은 ‘이완구 사정 카드’에는 국정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면서 필요하다면 여권 전체를 크게 흔들어놓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 같다”며 “다만 이런 움직임이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하고 정치적 해석만 낳을 경우 박 대통령은 도리어 레임덕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