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21. 현대·GS·조선·동아와 혼맥으로 연결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4.0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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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법조·언론계 아우르는 가벌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은 한때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포기하고 대신 언론사 창업에 나섰다. 그래서 탄생한 언론사가 중앙일보다. 이와 관련해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늘이 내린 사명이 사업에 있다고 믿고 사업을 통해 경제와 사회를 번영시킴으로써 국가나 민족에 공헌하려는 일념이었는데, 두 차례 변혁으로 중첩된 정치의 혼미는 경제에 파국적이라고 할 영향을 미쳤고, 그것은 국가 백년대계에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업 활동에서 얻은 수익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정부 운영과 국가 방위를 뒷받침하는 경제인의 막중한 사명과 사회적 공헌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부정축재자라는 죄인의 오명까지 쓰게 됐다. 이 같은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한 동기였다. 그러나 1년여를 두고 깊게 생각한 끝에 정치의 길을 단념했다.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 창설을 결심했다.

2006년 5월29일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맨 왼쪽)의 장남 정도씨와 서울대 공대 윤재륜 교수(맨 오른쪽)의 장녀 선영씨의 결혼사진. ⓒ 시사저널 포토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잡을 수는 있으나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리지는 못한다’는 명언이 있다. 마상의 총검보다도 강한 힘을 갖고 있는 펜, 언론도 잘못 사용하면 흉기가 된다. 언론은 그것을 구사하기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한다. 펜이란 이 양면의 성격과 기능을 지닌 ‘양날의 검(劍)’인 것이다. 이것을 충분히 인식한 바탕 위에서 자율의 억제가 통하고 균형 감각이 잡힌 힘 있는 종합 매스컴을 만들어 그것을 육성하고 싶었다.”

이병철, 신문·방송 운영 홍진기에게 맡겨

1964년 늦가을, 이병철은 훗날 사돈이 되는 홍진기에게 매스컴 사업을 맡아달라고 제안한다. 홍진기가 감옥에서 나온 지 채 1년이 안 됐을 때였다. 두 사람은 1951년 부산 피난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특별한 정을 갖게 된 것은 이병철이 비료공장 건설을 계획했던 1959년의 만남에서다. 이병철은 비료공장을 건설할 차관을 교섭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와 사전 협의를 해야 했는데, 이때 찾아가 만난 사람이 당시 홍진기 법무부장관이었다. 이병철은 이와 관련해 “차관을 들여오는 문제로 정부의 여러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홍진기 장관은 국가 경영이나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홍진기가 4·19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감옥에 가게 되자, 이병철은 사식·과일 바구니를 들여보내고 4~5차례 직접 형무소를 찾아가 특별면회를 한 적이 있다. 3년 3개월여 동안 감옥 생활을 한 홍진기는 1963년 8월15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중앙일보를 창간하기에 앞서 이병철은 일본에 가 마이니치신문·아사히신문 등 일본 주요 신문들의 경영과 편집 시설 등 신문 제작 전반을 시찰했다. 한국 신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검토를 끝냈다. 홍진기는 1963년 겨울부터 중앙일보 창간 계획 입안에 착수했지만 겉으로 나선 것은 1964년 라디오서울 사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라디오서울은 1966년 회사 이름을 TBC동양방송으로 바꾸었다.

중앙일보 창간을 준비하면서 이병철과 홍진기는 주 1회 이상 만났다. 1965년 4월 어느 날에는 반도호텔 555호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의논을 하기도 했다. 홍진기는 훗날 “아직 근대적 기업 경영의 불모지라 할 수 있었던 1960년대 중반의 언론계에서 신참 중앙일보가 기업적 경영을 내걸자 많은 사람들에겐 돈키호테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신문 사업을 일반 회사처럼 기업적 경영으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충고를 해주는 분도 많았다. 이 같은 경험이 우리 언론계가 자본제적 경영에 눈뜨는 한 동인이 되었음을 자부한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중앙일보는 1965년 9월22일 창간됐다. 창간호로 20만부를 찍었다.

홍진기가 중앙일보 창간 때부터 강조한 것은 세 가지였다. 정보성·계도성·오락성이다. 그러나 창간 1주년을 앞두고 ‘한비(한국비료) 사건’(삼성그룹이 공장 기계와 건설 장비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밀수를 한 사건)이 터졌다. 한비 사건과 관련한 중앙일보의 보도 태도는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았고 이 여파로 부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한비 사건 이후 중앙일보의 사세 회복에 고심하던 홍진기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장녀 홍라희가 이병철의 3남 이건희와 혼인한 것이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 이렇게 썼다. “홍진기 사장은 나의 사돈이면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앙매스컴의 운영에 있어서 나는 기본 방침만을 정하는 데 그치고 일체를 홍 사장에게 일임했다. 그는 신문·방송의 운영 전체를 책임지고 성심 성의껏 심혈을 기울여왔다. 홍진기 사장만큼 나를 이해해주고 협력해주는 사람도 드물다.” 중앙일보는 1999년 보광그룹과 함께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돼 독립법인화했다. 2006년에는 보광그룹과 중앙일보가 다시 분리됐다. 이때부터 홍석현 현 중앙일보 회장은 중앙일보를 맡고, 동생들은 보광그룹 경영을 맡았다.

홍진기는 1917년 3월13일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현재 성동구 하왕십리)에서 홍성우-이문익 부부의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홍진기의 선대는 조선 중기부터 하왕십리에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부 홍준표는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동대문 밖에서는 가장 큰 정미소였다. 하왕십리 집은 대지가 1000평이 넘었다. 1930년 이전 외아들 홍성우에게 정미소를 물려주었다. 홍준표는 1933년 8월 세상을 떠났다. 홍진기의 부친 홍성우는 정미소 운영보다는 다른 곳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동아일보 왕십리 분국 총무, ‘시대일보’ 동부지국 고문 등으로 활동했고 한때 추풍령 부근 금광에 투자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지금의 한양대 일대 땅이 홍성우 일가의 소유였다. 55세 때인 1943년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67세인 1955년 세상을 떠났다.

1976년 삼성그룹 전산실 개장식에서 설비를 둘러보는 이병철 회장(왼쪽에서 다섯 번째)과 홍진기 사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도 보인다. ⓒ 연합뉴스
사돈 허광수 통해 방상훈·정몽준과 연결

당시 홍진기의 집에서 하숙했던 하숙생들 중에는 좋은 가문 출신 수재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은 법무부·문교부 장관을 지낸 황산덕, 문교부장관과 부산대 총장을 지낸 문홍주, 농림부 차관을 지낸 김봉관,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선우종원 등이다.

1940년 3월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한 홍진기는 1941년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그가 판사로 임명을 받은 것은 1943년 10월이었다. 홍진기는 전주지방법원에 부임한 지 두 달 만인 1943년 12월 조흥은행 상무를 지낸 김신석과 남의현 부부의 1남 1녀 중 장녀인 김윤남과 결혼했다. 동료 법관이 홍진기에게 당시 이화여전에 재학 중이던 김윤남의 얘기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 홍진기는 김신석에게 청혼을 허락해달라고 청했으나 김윤남의 부친인 김신석과 그녀의 오빠는 홍진기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1년 이상 결정을 하지 못했다. 김윤남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

홍진기-김윤남 부부는 전주에 근무할 때인 1945년 7월15일 첫 딸을 얻자 이름을 라희(羅喜·전라도에서 얻은 기쁨)라고 지었다. 이어 1949년 장남 홍석현, 1953년 차남 홍석조, 1954년 3남 홍석준, 1956년 4남 홍석규, 1958년 차녀 홍라영을 낳는 등 4남 2녀를 뒀다.

현재 중앙일보와 JTBC 등이 속해 있는 중앙미디어네트워크의 회장으로 있는 홍석현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등을 지낸 후 지금의 중앙일보 회장을 맡고 있다. 홍석현은 신연균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부친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신직수는 검찰총장·법무부장관·중앙정보부장을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검찰총장직에는 무려 8년 이상 있었다.

홍석현의 자녀(2남 1녀) 중 장남인 홍정도는 현재 중앙일보·JTBC 대표이사다. 그는 2005년 5월 중앙일보 전략팀 사원으로 입사해 2009년 1월 전략기획담당 이사로 승진했다. 2010년 1월에 상무(전략기획실장), 2011년 4월에 지원총괄 전무 겸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승진했다. 2012년 1월에는 JTBC 전무로 자리를 옮겼고, 2013년 1월 JTBC 부사장으로 승진한 후 그해 12월 JTBC 대표이사 부사장이 됐다. 2014년 12월에는 중앙일보 대표이사도 맡았다. 2006년 5월 결혼한 부인은 윤선영이며, 장인은 윤재륜 서울공대 재료공학과 교수다. 윤재륜의 장남 윤보현은 2012년 1월 구자균 LS산전 회장의 차녀 구소희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구자균은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동생 구평회의 3남이다. 구소희는 뉴욕 시러큐스 대학과 고려대 대학원 국제통상학과를 졸업했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윤선영은 지난해 12월, 제이콘텐트리 전략기획실장(상무)이 됐다. 제이콘텐트리는 ‘중앙일보문화사업’ ‘IS일간스포츠’ ‘드라마하우스&제이콘텐트허브’ ‘메가박스’ 등을 종속 회사로 두고 극장·방송·신문·잡지·공연 사업 등을 하는 회사다. 홍정도의 처조부는 유화증권 등을 설립한 윤장섭 성보그룹 명예회장이다. 호림박물관을 설립·운영하는 성보문화재단 이사장이기도 하다.

홍석현의 장녀 홍정현은 2007년 삼양인터내셔널 허광수 회장의 장남 허서홍과 결혼했다. 허서홍은 서울대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한 뒤 삼정KPMG와 GS홈쇼핑 등에서 근무했으며, 미국 스탠퍼드 대학 비즈니스스쿨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현재 GS에너지 가스 프로젝트 추진 TF 부문장을 맡고 있다. 그는 2014년 10월부터 지난 3월3일까지 20차례에 걸쳐 GS 주식 23만4000주를 매입해 본격적으로 입지 강화에 나서고 있다.  허서홍의 GS 지분율은 0.64%에서 0.89%로 0.25%포인트 늘어났다.

허광수는 LG 창업주인 구인회(구본무 현 LG그룹 회장의 할아버지)와 동업한 허만정의 장남인 허정구의 3남이다. 허광수의 둘째 형이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이고, 전경련 회장이자 GS그룹 회장인 허창수가 사촌동생이다. 허광수의 아랫동서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6남 정몽준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허광수의 장인은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이다.

홍정현-허서홍이 결혼함으로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허광수의 딸과 아들을 매개로 혼맥이 이어진다. 방상훈의 장남 방준오가 지난 2000년 5월 허광수의 장녀 허유정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노신영 전 총리 통해 현대가와 인연

홍석현의 누나로 미술관 ‘리움’ 관장을 맡고 있는 홍라희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이다. 홍진기가 훗날 사위가 되는 이병철의 3남 이건희를 처음 만난 것은 1964년이다. 이건희가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 졸업반일 때 이병철이 함께 일본에 들른 홍진기에게 “우리 셋째입니다”라고 인사를 시켰다. 홍라희가 이병철을 처음 만난 것은 그 후였다. 홍라희가 서울대 미대 3학년 때인 196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했는데, 당시 그녀는 부친 홍진기의 부탁으로 국전을 관람하러 온 이병철을 안내했다. 이런 인연은 1966년 8월, 이병철 내외와 이건희 그리고 홍라희와 그녀의 모친 김윤남 등이 함께한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만남으로 이어졌다. 1967년 1월 이건희와 홍라희는 약혼했고, 그해 5월 결혼했다.

홍석현의 첫째 동생 홍석조는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 회장이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홍석조는 검찰에 오래 몸담았는데 광주고검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나왔다. 그의 부인은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동생인 양기식의 딸 양경희다. 홍석조의 아들 홍정국은 BGF리테일에 입사한 지 1년 6개월 만인 2014년 상무로 승진했다. 그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2011년까지 보스턴컨설팅그룹코리아에 근무하다 2013년 6월 BGF리테일 경영혁신실장으로 입사했다. 

홍석현의 둘째 동생 홍석준은 보광창업투자 회장이다. 보광창업투자를 맡기 전에는 삼성SDI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했다. 홍석현의 막내 남동생 홍석규는 외교관으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 후 외무부를 떠나 지금은 (주)보광의 회장으로 보광그룹 전체를 총괄하고 있다.

홍석현의 여동생인 홍라영 삼성미술관 리움 부관장의 시아버지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다. 노철수 아미쿠스 대표가 홍라영의 남편이다. 홍석현가의 혼맥은 노신영을 통해 현대가와도 연결된다.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장녀인 정숙영이 노 전 총리의 장남인 노경수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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