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섞어서 멀리 보내야 한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5.04.0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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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284에서 막 올린 <한국화의 경계, 한국화의 확장> 전시

화가 김병종(서울대 동양화과 교수)은 한지에 먹을 이용하는 작품을 하기도 하지만, 캔버스에 한지도 올리고 아크릴 컬러를 쓰기도 한다. 그의 그림은 한국화일까 아닐까. 서울대 국악과를 나온 소리꾼 이자람이 브레히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해 만든 창작 판소리 <사천가>는 반주에 양악기도 쓴다. <사천가>의 미국 공연 때 현지에서 “사천가는 김치 모양은 아닌데 가장 판소리적인 느낌, 김치 맛이 난다”는 반응도 나왔다.

이쯤 되면 ‘한국 전통’이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최근 문화역서울284에서 막을 올린 <한국화의 경계, 한국화의 확장>이라는 전시는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기획된 것이다.

“한국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한국화”

홍지윤_애창곡 愛唱曲 My Favorite Song|Ink & acrylic, varnish cover on Mulberry paper|2013 ⓒ 시사저널 최준필
이번 전시에 참가한 작가 29명의 작품 100여 점은 지·필·묵을 고수하는 전통 한국화가부터 조각가·설치작가·서양화가에서 출발한 작가 등 출발점이 다른 작가들이 ‘한국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번 전시에 참가한 원로 화가 곽훈은 “한국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한국화”라고 말했다. 오리 연작으로 유명한 이강소 작가는 “다양한 세대와 살면서 자기에게 솔직하고 진지한 작업 결과가 나오면 그게 한국화”라고 밝혔다. 함섭 작가는 “재료가 한국적이라고 한국화는 아니다. 한국적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한국화다. 한국적 정체성 없이 전통 재료만 썼다고 해서 한국화라고 할 수 없다. 작품에서 풍겨지는 한국적 정체성이 있어야 한국화”라고 강조했다. 작품에 쓰는 질료로 한국화와 서양화를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번 전시에 작가가 살고 있는 강화도의 포도나무 넝쿨과 강화의 돌을 이용해 <순환의 여행>이라는 설치작품을 출품한 차기율 작가는 “정신이냐 질료냐를 놓고 벌어졌던 한국화 논쟁은 오래된 것이다. 결국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다. 조선시대에 서양 미술 재료가 들어왔었다면 조선시대 화원도 유화를 그렸을 것이다. 질료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밝혔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정착해 활발한 활동을 펴온 화가 곽훈은 캔버스에 그린 평면 작업, 도예 작업, 설치 작업, 한지 작업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출발을 보면 ‘서양화’로 분류돼야겠지만 그의 작업은 한국인 또는 한국의 문화유산이라는 버팀목 위에 서 있다. 이번에 출품한 <점>도 한옥 대청마루를 연상시키는 대형 한지 설치물이다. 사각 전시실을 꽉 채운 대형 사각 풍등 형태로 온도가 올라갈수록 종이가 부풀면서 안의 공간이 커진다. 관람객은 이 사각 구조물을 따라 걸으면서 체험하거나 안에 들어가서 살펴볼 수 있다. 관람객이 이 한지 구조물을 따라 걸으면 한지의 부드러운 마찰음을 느낄 수 있다. 일종의 온몸 체감형 설치작품인 것. 곽 작가는 “이 작품은 한옥 창호로 들어오는 빛,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통을 문화재적인 의미로 그대로 계승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다만 지금을 사는 예술가들은 보편적이고 국제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① 곽훈_點|한지|500×600×350|2015 ② 김승영_구름|영상 설치|770×320×360|2015 ③ 구본창_잎HA 16 BW|Archival Pigment Print 49×42×3|2006 백자 소장처 리움 삼성 미술관 ⓒ 문화역서울284
우리 시대 한국화의 전정한 의미

그는 자신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인 1970년대 초반에도 한국화 논쟁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우리가 음식으로 세계에서 성공한 것은 껌이나 과자다. 오리지널 한국산인 떡과 김치를 갖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힘들다. 여기서 혼란이 오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우리가 좋게 만들어서 외국에 들고 나간 것은 모두 ‘메이드 인 코리아’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한국 것이다. 이걸 잘하기 위해서는 잘 섞어야 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 총장은 하버드 대학 출신이 아니다. 스탠퍼드 대학 총장도 스탠퍼드 출신이 아니다. 섞어야 한다. 식물은 씨앗을 멀리 보내려고 노력한다. 민들레 씨앗이 터지는 모습은 장관이다. 씨앗을 멀리 보내는 것은 근친교배를 막기 위한 식물의 지혜다. 한국화도 멀리 보내야 한다. 섞이는 속에서 정체성을 찾고 발전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총감독이자 작가로도 참여한 우종택 인천대 교수는 “한국화의 경계, 한국화의 확장전은 우리 시대에 한국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한국화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작가들 나름의 답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신이 경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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