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을 위해 그토록 고생했는데..."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4.13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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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끊기 직전 본지 기자와 만난 성완종 전 회장의 울분

얼마 전까지 대기업 회장으로 10여 개의 기업군을 이끌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64)이 4월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외 자원개발 비리와 관련해 법원의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목전에 두고서다. 300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9000억원대 분식회계 혐의를 둘러싼 진상은 별개로, 지금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인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성 전 회장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였다. 먹고살 길이 없어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충남 서산에서 달랑 100원을 들고 상경했다. 동생에게 보리쌀 몇 됫박 주고 서울에 올라와 만난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성 전 회장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삶의 철학이 어떠할지는 능히 짐작된다. 지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악착같았다. 한겨울에도 지하실 바닥에 종이 박스를 깔고 자야 했던 그는 당시 온몸에 박힌 ‘얼음’으로 숨지기 전까지 고통스러워했다.

이 같은 성 전 회장이었기에 건설업으로 돈을 벌자 기업 외의 분야에 손댄 첫 번째가 바로 장학 사업이었다. 1991년 30억원을 출연해 시작한 서산장학재단은 그동안 지급한 장학금만도 300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참모들이 장학 사업 보류를 건의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이 돈을 벌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장학 사업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자신은 3만원짜리 양복을 입으면서 향우회 등에는 3000만원을 선뜻 희사하기도 했다. 사업상 골프장에 나온 그의 골프채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만큼의, 상표도 제각각인 고물이었다. 민망스러울 만큼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타인, 특히 없는 이들에게는 후했다는 평이다.

3월21일 성완종 전 회장이 모친의 19주기 추모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내가 영남·호남 출신이라면 이러겠느냐”

성완종 전 회장은 지금은 고인이 된 모친을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부친이 새 여자를 들이면서 무한 고생을 했던 어머니였기에 더욱 절실했던 탓이다. 기자는 검찰 수사의 칼끝이 경남기업을 공개리에 정조준했던 지난 3월21일 성 전 회장을 만났다. 그의 모친이 잠든 서산 소재 선산에서다. 보통 서산 시내 교회에서 추모제를 지내던 것과는 달리 19주기인 올해는 묘소에서 직접 지냈다. 추모 행사 후 마이크를 잡은 성 전 회장은 “앞만 보고 달려왔다”며 “하늘을 우러러, 그리고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려고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가진 별도의 자리에서 “내가 영남 (출신)이라면, 호남이라면 이러겠느냐”며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식의 느낌을 피력했다.

그는 “내가 MB(이명박 대통령)건 박(근혜) 대통령이건 새누리당을 위해 그토록 고생했는데…”라면서 “컨소시엄 5개사의 일원인 내가 무엇을 멋대로 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숨지기 전날인 4월8일 기자회견에서 ‘친박’ ‘친이’ 운운한 속사정은 이런 데 있다. 그는 주거래 은행이 한밤중에 평가 점수를 낮춰 경남기업이 워크아웃에 몰렸을 때 “아무리 비올 때 우산 뺏는 은행이라지만 너무하다. 충청도 기업이라서 우습게 안다”며 절규하기도 했다. 목숨을 끊기 전 몇 차례 만났을 때는 “참 힘드네. 다른 것은 다 참겠는데 나를 아는 학생들이 나를 어떤 인간으로 볼지 정말 가슴 아프다”고 했다.

경남기업에 대한 본격 수사는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지난해 11월 국세청 자료를 넘겨받으면서부터다. 기자도 MB 정부의 실력자 L씨를 비롯해 현 정부 몇몇 인사들과 성 전 회장의 교분 등은 알고 있다. 홀몸으로 부딪쳐온 그이기에 ‘얼마간’의 ‘무리’는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럼에도 맨손으로 큰 기업을 일궜던 기업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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