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공사, ‘깡통 정유사’ 인수하려 안달했다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5.04.1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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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하베스트사 인수 당시 자문보고서에서 드러나

2009년 10월14일 오전 7시30분, 서울 서초구 팔레스호텔의 한 일식당. 당시 한국석유공사 강영원 사장을 비롯한 임원진 및 고위 관계자 19명이 모였다. 해외 자원개발의 일환으로 캐나다 정유사 하베스트의 자산 인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때만 해도 인수에 따른 위험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부실 논란에 휩싸인 하베스트의 자회사 ‘날’까지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상류 부문의 주식 일부만을 사들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날 이사회에서는 “상류 부문 자산만 인수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작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렇게 한국에서 희망 섞인 이야기가 오간 바로 그날, 지구 반대편 캐나다 하베스트는 이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날 30쪽 분량의 한 보고서가 작성돼 하베스트 경영진에 전달됐다. 해당 보고서는 하베스트가 한국석유공사에 자산을 넘기기 전 ‘TD시큐리티스(이하 TD)’라는 회사에 적정 가격 및 매각 방식 등의 분석을 의뢰해 작성된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만, 한국석유공사는 구매 의욕에 차 있기 때문에 거래 실행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당시 국정감사에 나온 강영원 한국석유공사 사장. ⓒ 연합뉴스
하베스트가 석유공사에 회사를 넘길 당시 상류 부문 주식 일부만 파는 것에서 빚더미에 있는 하류 부문까지 떠맡기는 것으로 계약 조건을 변경한 배경에는 바로 이 같은 TD의 결정적 자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자문 내용엔 석유공사가 결국 하베스트를 구매할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는데, 공교롭게도 하베스트 측에 그런 컨설팅을 해준 업체는 석유공사 자문업체 선정 입찰에 참가했다가 메릴린치에 밀려 떨어진 곳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시사저널은 컨설팅업체 TD가 하베스트로부터 의뢰받아 작성한 30쪽 분량의 보고서를 입수했다. 이 보고서는 석유공사를 암호명 ‘제우스(Zeus)’로 표기하고 있다. 일명 ‘제우스 프로젝트’는 석유공사의 인수·합병 제안에 대해 하베스트가 최대 이익을 창출하는 방안을 찾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진행됐다. 이 보고서는 각 항목별로 석유공사와의 거래에 대한 적정성을 평가했다. 해당 항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거래 실행 가능성과 관련해 석유공사를 평가한 다음과 같은 코멘트였다. “매매계약과 관련한 가격 등을 둘러싼 문제들이 있음. 그러나 한국석유공사는 구매 의욕에 차 있는 구매자임(Zeus is motivated buyer). 캐나다 정부의 승인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임.”

‘TD’ 자문 받은 하베스트 “날까지 인수해라”

투자 및 M&A(인수·합병) 거래에서 기본은 구매 의욕이나 절실함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는 국제 시장에서의 모든 거래에서 기본 조건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구매가격이 올라가고 ‘덤터기’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자원외교 성과에 목이 말라 있던 우리 공기업들은 매물이 나오면 바로 살 기세로 덤벼들었고, 이것이 결국 수조 원대 손실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기자가 호주에서 만났던 에너지 전문가 등도 이와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TD의 보고서는 우리가 왜 수조 원대 손실을 보는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미국계 컨설팅업체 고위 관계자는 이 보고서에 대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motivated buyer’라는 표현을 쓸 정도면 자문사는 Zeus(한국석유공사)가 반드시 거래를 할 것이란 확신에 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를 받아본 직후 하베스트는 “자회사 ‘날’까지 인수하라”며 계약 조건을 바꿨고, 결국 TD의 분석대로 석유공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M&A 분야 전문가인 서울 소재 한 경영대학 S교수는 “motivated buyer는 비합리적 구매 행위가 가능한 구매자란 뜻을 담고 있다. MB 정부 시절 에너지 공기업들을 보면, 누가 봐도 사고 싶은 티를 다 내고 다니면서 도대체 어떻게 손해 보지 않는 자원외교를 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했는데 결국 문제가 터졌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보고서를 작성한 TD는 2009년 3월11일, 석유공사가 해외 투자 자문사를 모집했을 당시 입찰에 참가했던 곳으로 밝혀졌다. 당시 미주계 및 유럽계 10개 업체가 입찰에 참가했는데 이들에 대한 평가는 계량지표와 비계량지표 점수를 더해 이뤄졌다. 이때 TD는 계량지표에서 10점 만점에 9.77점을 받아 2위(6점)를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메릴린치는 계량평가 점수 5.43점으로 공동 5위였다. 그런데 선정위원들이 판단하는 비계량평가 부문에서 메릴린치는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아 종합점수에서 1위를 했고, 이 때문에 특혜 의혹을 받고 있다.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석유공사가 떨어뜨렸던 곳이 부메랑이 돼 상대방 측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 꼴이 됐고, 당시 1위를 했던 메릴린치는 오히려 상대방에 유리한 자문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회 자원외교 국조특위 소속 전정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석유공사가 전문성 분야에서 1등을 했던 TD를 제치고 메릴린치를 자문사로 선정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됐다”며 “메릴린치로부터 엉터리 자문을 받아 2조원 가까이 비싼 가격에 하베스트를 인수하게 된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검찰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만 나온 광구도 3800만 달러 가치 매긴 메릴린치 


만약 자신이 고용한 변호사가 훗날 알고 보니 자신이 아닌 소송 상대방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문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엄청난 배신감이 몰려올 것이다. 그런데 자원외교와 관련해 실제 이처럼 황당한 자문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 의혹의 중심에 메릴린치 서울지점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집사로 통하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의 아들 김형찬씨가 근무했던 곳이다.

한국석유공사는 캐나다 정유사 하베스트 인수와 관련한 자문사로 메릴린치를 선정했다. 온갖 의혹 속에 자문사로 선정된 메릴린치는 하베스트의 가치를 평가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평가 방식이 의문투성이다. 우선 당시 메릴린치와 동시에 조사를 진행했던 ‘라이더스캇’사의 평가 결과와 비교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석유공사는 하베스트를 인수하기 전 메릴린치의 평가와 별도로 기술 부문에 대한 전문적 평가를 위해 ‘라이더스캇’에 기술자문을 맡겼다.

라이더스캇은 추가 생산 가능 매장량을 경제성 평가에 반영하기 어렵다고 한 반면 메릴린치는 이 매장량을 3억6400만 달러의 가치로 환산해 인수가격에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일부 광구에서 추가 생산 가능성을 실험한 결과 99.2%가 물이 발견돼 유가스 추가 생산이 거의 없는 것으로 평가됐는데 메릴린치는 이런 광구의 추가 매장량 가치를 3800만 달러로 인정했다.

또 오일샌드(석유가 녹아 있는 모래)에 대해서도 라이더스캇은 지층이 얇아 경제성이 없다고 평가했는데, 메릴린치는 1400억원의 가치가 있다고 전혀 다른 평가 결과를 내놓았다. 이 차이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석유 채굴 전문가 L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일샌드에서 관을 설치해 뽑아낼 수 있는 기본 깊이가 있는데 하베스트 건의 경우 아예 그 깊이 자체가 안 됐다. 현재의 기술로는 채굴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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