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3. 의자왕, 나당 연합 오판했다 패망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4.16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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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치는 줄로 착각…김춘추는 당 태종 설득 성공

외교는 때로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그런 경우였다. 우리는 백제의 의자왕을 삼천궁녀나 끼고 놀다가 망한 왕으로 기억하지만, 이는 망국 후에 만들어진 이미지였다. 의자왕의 본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 초 신라를 강하게 압박했다. 즉위 다음 해(642년) 7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 서쪽의 미후성(??城) 등 40여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다음 달에는 당항성을 치는 것처럼 신라군을 속인 후 장군 윤충(允忠)에게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도록 했다. 이때 대야성 성주 김품석(金品錫)과 그 부인 고타소가 자살하는데, 이 사건이 백제와 신라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는 삼국통일 전쟁으로 비화한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이 등장하는 KBS 드라마 의 한 장면. ⓒ KBS
고구려 멸망 원했던 당나라 마음 파고들어 

고타소는 김춘추(태종무열왕)의 딸이었는데, <삼국사기>는 고타소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기둥에 의지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충격의 정도를 말해주고 있다. 김춘추는 비로소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라고 한탄한 후 백제 멸망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이것이 두 나라가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는 시발이었다. 공교롭게도 대야성 사건이 발생한 642년 고구려에서는 영류왕의 대당(對唐) 굴욕 외교에 대한 반발로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럴 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왕족의 딸과 사위가 전사하는 약소국 신라로서 한 왕족이 백제 멸망에 생애를 걸었다고 갑자기 군사력이 강해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외교로써 군사를 증강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외국군을 빌려 백제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김춘추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년) 이후 200년 이상 적국이었던 고구려를 전격 방문했다. 백제를 칠 구원군을 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되레 진흥왕 이래 신라의 영토였던 마목현(麻木峴·조령)과 죽령(竹嶺)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김춘추의 고구려 방문은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외국군 청병 의지를 꺾지 않고 647년에는 왜국(倭國)을 방문했다. 2년 전 왜국에서는 나카노오에(中大兄) 왕자가 왕실을 좌지우지하던 백제계 호족 소가노 이마코(蘇我入鹿)를 제거하는 태극전(太極殿)의 변, 즉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소가노를 제거한 나카노오에가 반(反)백제계라는 판단에서 군사를 빌리러 배를 타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왜국의 군사를 빌리는 데는 실패했다. 왜국은 사실상 백제의 지방 군현인 담로(擔魯)의 하나이거나 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 김춘추의 예상과는 달리 소가노를 제거한 나카노오에 왕자 역시도 백제계였기 때문이다.

두 번의 실패에도 김춘추는 좌절하지 않았다. 왜국 방문 이듬해인 진덕여왕 2년(648년)에는 당나라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아들 문왕까지 대동했다. 문왕을 인질로 맡기는 대신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3년 전 고구려 정벌 실패로 상심해 있던 당 태종은 머나먼 내륙의 장안성(지금의 서안)까지 찾아온 김춘추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나당 연합군’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복잡한 계산법이 작용했다. 신라의 주적은 백제였지만, 당나라의 주적은 고구려지 백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백제와 수(隋)나라 관계에 대해 의미심장한 구절을 적고 있다. ‘대업 3년(607년·백제 무왕 8년) 장(璋·무왕)이 사자 연문진(燕文進)을 보내 조공했다. 그해에 또 사자 왕효린(王孝?)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의 토벌을 청했다. 양제는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러나 장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통화(通和)를 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다.’

백제 무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을 청했지만 사실은 고구려와 내통하면서 중국을 엿본 것이라는 말이다. 외교란 때로는 이처럼 서로의 이익에 따라 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을 서슴지 않는다. 처음에는 백제 역시 신라 못지않게 중국과의 외교에 공을 들였다. 당나라가 수나라를 멸망시키자 백제는 곧바로 당나라와도 수교했다. 그래서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은 무왕이 641년 세상을 떠나자 당 태종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곡을 하고, 의자왕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였으며, 부물(賻物) 200단(緞)을 내렸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태종이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난 후 조서를 보내 “먼 나라를 생각하는 도리는 왕명에 앞서는 것이 없으며, 죽은 사람을 포창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 하여 막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고 애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심지어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조’에 따르면,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백제에서 바친 금휴개(金?鎧·황색 칠을 한 갑옷)를 입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당 태종이 무왕의 맏아들 의자왕의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당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의자왕, 신라 외교 활동 모른 채 왕권 강화만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신라에 주어 길이 평안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두 나라의 영토 분할 협정이었던 셈이다.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라는 영토 분할 협정은 민족사의 견지에서 볼 때는 고구려 북방 영토 대부분과 백제가 장악했던 일본 열도의 상실을 뜻하지만 멸망 위협에 시달리던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강역의 3배 확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김춘추가 이처럼 백제 멸망에 목숨을 걸고 고구려로, 왜국으로, 당나라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백제는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일본서기> ‘황극(皇極)1년(642년)조’에서 “(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고 제왕자(弟王子·왕의 동생) 교기(翹岐·교우기)와 동모매(同母妹)의 여자 4인, 내좌평(內佐平)의 기미(岐味), 높은 가문의 40여 인이 섬으로 추방당했다”고 전하고 있듯이, 의자왕은 재위 이듬해 정월 모후 사망을 계기로 동생과 좌평 등의 반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렇게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은 그해 신라를 기습 공격해 40여 성을 빼앗고 김품석 부부를 전사시켰다. 이 같은 대내외적 전격 작전을 통해 의자왕은 왕권을 안정시켰다고 판단했지만, 재위 14년(654년) 무렵부터 내부 동요를 겪게 된다. 의자왕의 일방적 왕권 강화에 귀족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백제에는 대성(大姓) 8족이라는 전통적인 지배 집단이 있었다. <수서> ‘백제조’는 “(백제에는) 여덟 씨족의 대성이 있으니,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氏)·해씨(解氏)·진씨(眞氏)·목씨(木氏)·국씨(國氏)·백씨(氏)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호족들은 각 지역을 세력 기반으로 갖고 있었는데, 한성 시대의 지배 호족들은 진씨·해씨 등과 같은 왕비족들이었고, 웅진 시대에는 이들 외에 백씨·연씨·사씨·목(木?:목협)씨 등이 새롭게 대두했는데, 이들은 웅진 지역 토호들이었다. 사비성(부여) 시대에는 사씨, 즉 사택(沙宅)씨가 부상했는데, 사택씨의 정치 기반이 금강 유역이었다. 의자왕 14년(654)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하고, 이듬해에는 좌평 임자가 신라의 김유신과 내통했다.

4월10일 한민구 장관과 카터 장관이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의자왕은 내부의 이런 동요를 모른 채 재위 15년  “태자의 궁을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왕권 강화에만 매달렸다. 또한 재위 17년(657년)에는 자신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제수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食邑)을 주었는데, 이 조치 역시 호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호족 집단의 붕괴는 백제 외교 정보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로 나타났다. 의자왕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덕물도(德物島·현 경기도 남양만 덕적도)에서 김유신과 회동했을 때도 이들의 공격 목표를 고구려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당나라군이 백제 영토에 상륙하자 크게 놀란 의자왕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책회의에서 좌평 의직(義直)은 먼 뱃길에 피곤한 당군을 공격하자고 주장하고, 달솔 상영(常永) 등은 사기충천한 당군을 피하고 신라군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는데, 의자왕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고마미지현에 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興首)의 견해를 물었으나, 정작 전략 요충지 백강(白江·기벌포, 오늘의 충남 장항)과 탄현(炭峴)을 지키라는 그의 견해는 신하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사이 당군이 이미 백강으로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넘자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신하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백제 멸망은 외교력의 패배

왕성을 지키는 계백의 결사대가 겨우 5000명이었다는 사실은 의자왕 체제가 나당 연합군의 본격적 공격 이전에 이미 내부에서부터 붕괴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는 변변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수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백제의 멸망은 군사력의 패배라기보다는 외교력의 패배였다. 당나라 입장에서는 연합의 대상이 꼭 신라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내부 왕권 강화에만 전념하다가 국제 정세가 백제의 멸망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도 연속적으로 외교적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독자적 천하관이든 조공 외교든 형식은 달라도 그 궁극적 목적은 국익 강화에 있다는 사실을 늘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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