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22. 윤보선·정몽준·홍정욱 등과 혼맥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4.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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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영·우영 형제, 정·관·재·언론계와 여러 갈래로 연결

1920년 3월3일 창간된 조선일보는 1933년 3월2일, 현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증조부인 방응모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방응모는 자신이 운영하던 교동광산을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판 돈으로 조선일보사의 경영권을 인수해 같은 해 7월10일 사장으로 취임했다. 1990년에 간행된 <조선일보 70년사>는 ‘방응모는 조만식 사장의 적극적인 권유로 조선일보사와 인연을 맺었다. 처음에는 영업국장으로 입사했다. 영업국장에 취임한 공식 날짜는 1933년 1월18일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그 전해인 1932년 6월15일 조선일보에 입사했다’고 기록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 전 조선일보는 재정이 취약해 내분과 파업을 겪고 있었다. 당시 편집국장은 시인 주요한, 영업국장은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으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느닷없이 사망한 유석 조병옥 박사였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부인 윤순명씨가 자녀 결혼식에서 하객을 맞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아들들 일찍 잃은 방응모, 손자 방일영 키워

1980년 발간된 <계초 방응모전>에는 이와 관련한 주요한의 증언이 나와 있다. “방응모는 광산을 일본인 회사에 판 돈 4000원이 든 예금통장을 총독부에 제시했다. 총독부에서는 종래의 인가를 취소하고 새로 인가를 내주는 형식으로 방응모의 뜻을 받아들였다. 방응모는 필진을 강화하려고 정주 출신 소설가인 춘원 이광수를 동아일보에서 초치해 주필 겸 논설위원으로 앉혔다.” 1935년에는 언론사 최초로 취재 전용 비행기를 구입하고 사옥을 준공하는 등 공격 경영을 펼쳤다.

방응모는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농촌진흥회와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하다가 1926년 7월 금광을 발견하면서 막대한 부를 일궜다. 2000평 대지를 사들여 99칸짜리 한옥을 지어 살았다. 맏손자 방일영을 6인승 미제 포드 자동차의 뒷자리에 태워 정주에서 삭주까지 140리 길을 내달리곤 했다. 방응모는 손자인 방일영·우영 형제에게 어렸을 때부터 위아래를 분명하게 가르쳤다. 식사 때도 장손인 방일영하고만 겸상을 했다. 방응모는 16세 때 승계도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부인 승씨 또한 경성의전에서 복부 수술을 받은 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방응모가 형 방응곤의 아들 셋 가운데 둘째인 재윤을 양자로 받아들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광복 후 방응모는 한때 정치에 뜻을 두었다. 한독당 재정부장을 지냈다. 1950년 5월3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기도 의정부 지역에 출마해 조선일보의 홍종인 주필, 성인기 편집국장 등으로 유세반을 조직하고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 손자 방일영은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100표 차이로 낙선하자 상심한 방응모는 몸져누웠고 적자에 허덕이던 조선일보는 빚이 더 늘어났다. 사원들의 월급 석 달 치가 밀리자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방응모는 신문사 주식을 처분해 체불 임금을 지불하려고 갖고 있던 주식의 절반을 동양화재보험에 팔기로 했다. 그런데 계약을 하기로 한 날이 1950년 6월25일이었다. 그날 6·25가 일어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며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장충단공원 부근 신당동 집에 머무르던 방응모는 6·25 때 납북됐다. 방일영은 북한산 동굴 속 암자를 은신처로 삼아 숨어 지내며 위기를 넘겼다.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된 것은 1924년 8월23일이었다. 방응모와 달리 방재윤은 “맞아야 사람이 된다”면서 아들 방일영을 엄하게 키웠다. 의주농업학교를 나와 훗날 평안북도 박천군에 있는 조일보통학교 농업교사가 된 방재윤은 1923년 유기 도매상을 운영하던 이은엽의 장녀 이성춘과 혼인했는데 그해 첫째 아들 방일영이 태어났다.

방재윤은 이성춘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뒀다. 그러나 둘째 아들 방필영은 두 돌도 되기 전에, 누이동생 셋 가운데 맏이였던 방숙영은 1951년 1·4 후퇴 때 피난지인 경북 하양에서 숨졌다. 셋째 아들 방우영은 1928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방응모는 “일등인 형(일영)과 더불어 또 번영하라는 뜻에서 우영이라고 하자”며 손수 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방재윤은 39세 때인 1940년 4월, 조림사업을 지휘하며 머무르던 함경북도 영흥에서 간호사가 실수로 잘못 놓은 주사를 맞고 쇼크사했다.

1986년 4월4일 조선일보 지령 2만호 축하 기념식 리셉션에서 방일영 회장(왼쪽)과 방우영 사장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 뉴스뱅크 이미지
한국일보 창업주 장기영도 조선일보 출신

오늘날 조선일보의 기초를 닦은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은 1923년 11월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동문동 672번지에서 태어났다. 1937년 서울로 와 경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다. 조부 방응모는 방일영의 제일고보 진학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뜻에서 학교에 선뜻 피아노 한 대를 기증했다. 당시 조선에 두 대밖에 없었다는 독일제 그랜드피아노였다. 방일영은 졸업장 없이 제일고보 4학년을 수료하고 1941년 일본 도쿄에 있는 중앙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방일영은 언론인이자 아동문학가인 윤석중과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지붕 아래서 살았다. 1943년 4월6일 서울로 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1999년 3월18일 퇴임했다.

방응모는 손자 방일영이 학병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병원 설립자인 고향 후배 백인제를 불러 상의했다. 백인제는 방일영의 왼쪽 뺨 귀 밑에서부터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을 집도했다. 그런 뒤 방일영은 일단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를 했다.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였다. 21세였던 방일영은 1944년 11월 세 살 아래 박현숙과 결혼했다. 박현숙은 한학자인 부친 박순흠과 고영선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한 해 전 동생 방우영의 영어교사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방응모를 찾아온 것이 결혼으로 이어졌다.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친정집에서 방일영과 혼례를 치른 박현숙은 6·25가 일어날 때까지 6년 동안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박현숙은 당시 의정부 집에서 방응모의 부인 승계도 말고도 둘째 부인 이인숙 등 시할머니 네 명을 모시고 살았다.

할아버지 방응모가 납북되자 1950년 10월23일 속간 당시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맡은 방일영은 사실상 경영 책임자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1952년 4월에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낸 장기영씨(한국일보 창업주)가 조선일보에 합류해 대표를 맡았다. 2년 후 조선일보를 떠난 장기영은 김활란으로부터 경영난에 허덕이던 영자지 ‘코리아타임스’를 인수해 사장이 됐다. 그러더니 곧 태양신문을 인수해 제호를 한국일보로 바꿔 1954년 6월9일 창간호를 냈다. 

1954년 방일영은 조선일보의 발행인과 대표를 맡아 ‘방일영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백남일이다. 방일영의 제일고보(지금의 경기중·고교) 동창이었던 그는 당시 태창방직 사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빌려준 5억환으로 빚을 말끔히 갚고 출발했던 것이다. 백남일의 동생이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다. 방일영은 본부인 박현숙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장남이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고, 차남이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이다. 방일영은 본부인 외에 첫 번째 혼외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셋, 두 번째 혼외부인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롯데·GS·일신방직 등 재계와 혼맥

방일영은 1964년 조선일보 대표이사에서 이사회 회장으로 옮겼다. 41세 때였다. 후임 대표이사는 동생인 방우영 전무가 맡았다. 방일영은 회갑 기념 논문집인 <태평로 1가>에서 동생과의 관계를 ‘따로 움직이는 한 몸’이라며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단둘뿐인데 의(義)가 좋은 것은 당연지사다. 하나는 어려서 잃고 두 형제이니, 우리는 끝까지 한 몸 같은 형체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몸은 갈라진 형체로서 둘이지만, 어떤 것을 의논하다 보면 때때로 꼭 따로 움직이는 한 몸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방우영은 “소생은 충실히 전 대표이사의 방침을 따를 생각입니다”로 시작하는 내용의 취임사를 했다. 방우영은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평소 형님을 아버지 이상으로 어려워했고 형님의 뜻을 거역해본 적이 없었다.”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이선영씨와 결혼했는데 장모는 민족사학자인 호암 문일평의 딸이다. 문일평의 아들 문동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방응모와 문일평이 가까운 사이여서 식구들끼리도 알고 지냈다. 1959년 5월15일 있은 방우영-이선영의 결혼식에서 주례는 유진오 고려대 총장이 서고 송인상 재무부장관이 축사를 했다.

방우영은 1남 3녀를 뒀다. 딸 셋을 둔 다음 마흔을 훌쩍 넘겨 아들이 태어났다. 막내딸을 낳은 지 8년 만이었다. 장녀 방혜성의 남편은 서성환 태평양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고려대 경영학과와 일본 와세다 경영대학원을 나온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이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도 근무했던 방혜성은 현재 태평양학원 이사로 있다. 서영배의 동생인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부인은 신춘호 농심 회장의 막내딸 신윤경이다.

방우영의 차녀 방윤미의 시아버지는 9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김도창 전 법제처장이다. 3녀 방혜신의 남편은 정연욱 경남에너지 부회장이다. 정연욱의 부친은 국회 외무위원장을 지낸 정재문 대양산업 회장이고, 조부는 7선 의원을 지낸 정해영 전 국회 부의장이다. 방우영의 외아들인 방성훈 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부사장은 최창근 고려아연 회장의 딸인 최강민과 결혼했다. 방우영의 막내 여동생인 방선영의 시아버지는 숭실대 이사장과 총장을 지낸 김형남 일신방직 창업주다. 방선영의 남편 김창호는 일신방직 명예회장으로 있다.

방일영은 정치권의 윤보선 전 대통령과 윤치호 전 장관과도 혼맥이 연결된다. 아들 방상훈 사장의 부인 윤순명씨의 증조부가 바로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강점기 때의 정치가였던 윤치호다. 윤순명은 또 윤보선 전 대통령과 친척 관계이기도 하다.

방상훈 사장의 장남 방준오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이사대우는 지난 2000년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장녀 허유정과 혼인했다. 허광수의 부인은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딸인 김영자다. 김영자는 정몽준 전 의원의 부인 김영명의 언니다.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회장의 장모가 김영자의 언니 김영숙이다. 허광수의 아들 허서홍은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의 장녀인 홍정현과 결혼했다. 허광수를 매개로 조선일보·중앙일보·헤럴드미디어가 인연을 맺었다. 방상훈의 차남 방정오는 수원대학 설립자 이종욱의 차남 이인수 수원대 총장의 딸 이주연과 결혼했다. 지난해 12월 29일 단행된 TV조선 임원 인사에서 방정오 TV조선 마케팅실장(국장)은 임원(상무)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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