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이 짜이고 섞여 환상이 되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5.04.1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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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2일까지 프랑스에서 샤갈 30주기 기념 태피스트리 특별전

우리에게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은 꿈이자 환상이며, 사랑의 화가이자 향수의 미술가다. 서정적이고 꿈같은 그의 화면은 우리에게는 김춘수의 시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로 이미 친근하다. 유대인인 그는 러시아의 비데브스크에서 태어나 1910년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에 갔다가 1914년 고향으로 돌아가 순수미술 인민위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예술을 정치적 선전 도구로 사용하려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처사에 회의를 느끼고 모스크바, 베를린을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네덜란드·스페인·프랑스 등을 여행하면서 생을 보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에 망명했다가 말년의 20년을 프랑스 니스 인근 생폴(St. Paul) 에서 보내다 그곳에 묻혔다.

영원한 사랑의 아이콘 샤갈

러시아 혁명 당시 유대인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일은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시로, 영화로 더 유명한 그는 다시 영화 <노팅힐>을 통해 결혼 적령기의 청춘남녀에게 사랑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다. 이렇게 그는 우리에게 지상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자리한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다. 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샤갈은 노후에 프랑스 방스(Vence)에 있는 마티스의 성당(Chapelle du Rosaire de Vence, 일명 Matisse Chapel)을 염두에 두고 성경의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예배당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유대교인이라는 이유로 그가 사랑한 생폴은 그의 교회당 건설을 반대한다. 그러자 1966년 샤갈 부부는 프랑스 정부에 구약성서의 ‘인간의 창조’ ‘노아의 방주’ 등을 그린 작품 등 약 450여 점을 기증했고, 1973년 니스의 시미에 언덕 아래에 전시관을 만들어 공개했다.

샤갈의 원화와 이를 태피스트리로 번안한 이베트 코키유 프랭스의 태피스트리(오른쪽). ⓒ 정준모 제공
그의 또 다른 안식처인 프랑스 국립 샤갈미술관에서 지난 3월21일부터 오는 6월22일까지 그의 태피스트리전이 열린다. 태피스트리(tapestry)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카펫(Carpet)과는 다른 일종의 ‘이동용 벽화’다. 벽 장식을 위한 미술품이라서 씨줄과 날줄에 여러 가지 색실을 장착해 이를 짜 그림을 만들어내는 고난도의 공예미술이자 고난을 수반하는 노동이다. 하지만 올올이 서로 짜이고 섞이면서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매우 작은 픽셀로 이루어져 정교한 사진처럼 보인다. 태피스트리는 일찍이 이집트에서도 발견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더욱 발전해 가문의 상징 엠블럼이나 캐노피 뒤에 걸려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또 성모자상 뒤편을 태피스트리로 장식하는 그림이 많이 그려질 만큼 일상적인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① 생폴의 샤갈 무덤에는 그가 유대인이라 십자가가 없다. ② 니스의 샤갈뮤지엄에서 열리는 샤갈 태피스트리 전시. ⓒ 정준모 제공
올해는 샤갈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고자 샤갈미술관은 그가 말년에 그림과 조각이 아닌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천착했던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모자이크 외에 태피스트리에 주목했다. 그의 태피스트리는 그의 원화와 드로잉을 바탕으로 프랑스 고블랭 국립 태피스트리 제작소와 이베트 코키유 프랭스(Yvette Cauquil-Prince, 1928~2005년)라는 태피스트리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와 직공의 만남 및 협력을 통해 새로운 예술로 태어났다. 샤갈의 첫 번째 태피스트리는 1965년부터 1968년까지 고블랭에서 직조되어 오늘날 이스라엘 의회의 태피스트리 컬렉션을 이루었다. 이때 이미 그는 이베트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더 태피스트리에 빠져들었다. 그의 아내가 질투를 할 만큼 태피스트리는 두 사람을 이어주었고 그 후 1970년부터 이듬해까지 이베트와 다시 함께 태피스트리를 제작한다. 이즈음 이베트는 이미 파블로 피카소, 막스 에른스트, 폴 클레와도 작업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새로운 씨줄과 날줄의 예술인 태피스트리로 번안해 새로운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후 샤갈은 그와 더불어 20여 년 동안 예술적 동지로 태피스트리에 매진했고 샤갈 사후에도 그는 태피스트리를 통해 새로운 예술로 샤갈을 환생시켰다. 이베트는 태피스트리라는 매체를 통해 샤갈의 회화, 조각 및 스케치에서 표현되고 발견할 수 있는 모든 풍요로움을 태피스트리로 전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단순하게 샤갈의 원화나 드로잉 또는 밑그림을 크게 만들어내거나 재료와 기법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과 규모를 지닌 예술로 환생시킴으로써 신선한 또 하나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작곡가인 샤갈을 이해해야만 했다. “샤갈은 나에게 음악이다. 난 너무 깊이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샤갈의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

12점의 원화와 12점의 태피스트리 전시

이번 전시에는 12점의 원화와 그것을 토대로 한 12점의 태피스트리가 전시된다. 회화나 수채화의 그림으로서의 멋이나 맛이 태피스트리라는 고난도의 공예 기법을 통해 한 땀 한 땀 더해지면서 미묘하게 변화를 자아내는 특징을 경험하게 한다. 또 샤갈 사후에 제작된 태피스트리의 경우에도 작가의 승인을 얻어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함께 전시돼 표현과 해석의 자유를 번역자인 이베트에게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전시실에는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는 공정을 보여주는 비디오와 제작 시 필요한 재료, 즉 염색된 각종 실과 모눈종이 기법을 통해 작은 원화를 확대시켜 각각의 면을 색실로 짜나가는 고도의 기술적인 면모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태피스트리라는 분야의 이해를 돕는다.    

 올 6월 이전에 니스에 갈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샤갈의 태피스트리는 큰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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