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그녀, 아버지를 내치다
  • 최정민│파리 통신원 ()
  • 승인 2015.04.2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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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 전쟁’에서 승리한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 대표

“르펜 가문은 언제나 ‘왕좌의 게임’이다.” 프랑스의 한 지방 언론 매체인 ‘레퓌블릭 로렌’의 필립 워캄프 기자는 최근 자국 언론을 달군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의 내홍을 이렇게 정리했다. 연맹 국가인 칠왕국의 통치 권력인 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그리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스토리가 프랑스의 가족 정당 국민전선에서는 늘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국민전선의 내홍은 프랑스 언론들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웃한 독일 언론들까지 나서서 ‘르펜 집안의 대소동’(쥐드도이체차이퉁), ‘아버지가 떠나야 한다’(슈피겔 온라인), ‘마린 르펜의 친부 살인은 진지하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디벨트) 등 다양한 촌평을 내놓고 있다.

유럽 주요 언론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아버지가 딸에게 당권을 빼앗긴 모양새인 국민전선의 집안싸움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독일 일간 ‘디벨트’는 이렇게 지적했다. “딸인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표가 아버지를 죽이는 방법으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극우정당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만약 국민전선의 변화가 극우 정당의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가 된다면, 최근 수년간 유럽에서 불고 있는 극우 정당 돌풍은 단순한 유행이 아닌 심각한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부녀 갈등을 벌이기 전까지만 해도 다정한 사이였던 장 마리 르펜 명예총재(왼쪽)와 그의 딸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표. ⓒ AP 연합
권력에 다가가기 위해 아버지와 결별

사건은 국민전선 창업주인 장 마리 르펜이 지난 4월 초 프랑스의 한 극우 언론인 ‘리바롤’과 가진 인터뷰에서 시작됐다. 그는 “현 프랑스 정권은 이민자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현실 정치에 대한 원색적 비난부터 “나는 페탱 장군을 매국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지론까지 당당하게 펼쳤다. 페탱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군에 부역한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던 인물이다. 장 마리 르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북아프리카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는 “북유럽과 백인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러시아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전 방위적인 ‘막말’은 급기야 친딸인 마린 르펜을 향했다. 정년퇴임을 60세로 되돌리는 것을 ‘선동 정치’라고 비판하고, 2차 세계대전 나치의 만행에 대한 발언으로 부녀간에 갈등을 빚은 기억을 떠올리며 “자식에게 배반당했다”고 말했다.

인터뷰의 여파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마린 르펜 대표는 “모든 형식과 내용에서 장 마리 르펜과 생각을 달리한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런 논평만으로는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자 4월9일 프랑스 민영 TF1의 저녁 뉴스에 출연한 딸은 당의 명예총재이자 아버지인 장 마리 르펜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사실 장 마리 르펜의 막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막말은 극우 정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극우적인 발언들은 그가 만든 정당이 프랑스 정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마린 르펜은 아버지로부터 당권을 넘겨받은 후 극우적 색채를 지우려고 부단히 애써왔다. 극우 정당 행사의 단골 멤버인 스킨헤드족의 참가를 배제시키기도 했다. 그녀의 노력은 지난 많은 선거에서 증명되었는데, 올해 3월 지방선거에서는 1차 투표에서 프랑스의 제1 정당으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장 마리 르펜이 선동적이고 과격한 언사로 극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면, 그의 딸인 마린 르펜은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민자나 동성애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던 방법으로 극우 정당의 외연을 확대시키느라 애썼다. 그런 노력의 결과는 ‘3당 체제’를 확립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왼쪽의 사회당, 오른쪽의 대중운동연합으로 갈라지는 양당 구조인 프랑스 정치 지형에서 이제 국민전선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과거 창당 세대들의 국민전선이 ‘현실적인 권력 쟁취 가능성이 없었던 정당’이라면,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은 권력 쟁취가 가능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런 ‘수권 가능성’이 과거와의 결별, 즉 그녀의 아버지 세대와의 결별을 가속화했다는 것이 프랑스 정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아버지나 딸이나 다를 바 없다”

국민전선의 과거와의 결별은 마린 르펜의 대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초대 당수인 장 마리 르펜과 2대 당수인 마린 르펜의 결별은 이번 사태로 일단락됐지만, ‘미래 권력’으로 유력한 장 마리 르펜의 외손녀이자 마린 르펜의 조카인 마리옹 마레샬 르펜의 정치 행보 역시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이번 내홍에서 최고의 수혜자로 꼽히는 사람이기도 하다. 25세의 최연소 하원의원인 그녀는 장 마리 르펜이 호기롭게 지방선거 출마를 선언했던 올해 12월에 열릴 지방선거에 외할아버지 대신 출마하기로 했다. 딸과의 다툼에서 밀린 장 마리 르펜은 불출마 의사를 밝히며 손녀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녀는 현 당수인 이모와 명예총재인 외할아버지 사이의 중재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나는 어느 쪽의 꼭두각시도 되고 싶지 않다.” 프랑스 일간지인 ‘라 프로방스’와의 인터뷰에서 마레샬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며 외할아버지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나는 엄밀히 말해 극우적인 여성은 아니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는 나의 단어들이 아니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현재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렇다고 모든 사안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며 이모와의 관계에도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극우 정당의 속사정에 밝은 인사들은 “마레샬은 신출내기 정치인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미 외할아버지와 이모 사이의 권력투쟁 과정, 그리고 국민전선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팽(烹)당하는 것을 목격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에 따르면, 그녀가 하원 선거에 출마할 당시 장 마리 르펜은 어린 손녀인 마레샬에게 “내 명예를 빛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손녀는 외할아버지가 선거전의 전면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실해진 다음에야 출마를 결심했다. 그리고 1차 선거에서 대중운동연합 후보를 누르고, 2차 결선에서는 집권당인 사회당 후보를 누르며 42%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녀의 나이 불과 22세 때의 일이었다. 올해 12월 선거를 두고 외할아버지는 국민전선의 원로이자 자신의 측근인 골니쉬와 연대할 것을 주문했지만 마레샬은 단칼에 거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너무나 원로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마린 르펜의 행보가 극우 정당의 진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프랑스 언론과 정계는 일단 추이를 관망하는 모습이다. 극우 정당의 주류 진입을 낙관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샤를리 에브도의 전 편집장이었던 필립 발처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근본적으로 ‘증오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 마리 르펜이나 그의 핏줄들이나 다르지 않다”고 진화 가능성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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