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23. 삼성·현대·동부그룹과 사돈 맺어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4.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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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부통령·국무총리·청와대 외교수석 등 배출

동아일보 창업자는 인촌 김성수 전 부통령(1891~1955년)이다. 김성수는 교육계에 오래 종사했던 교육자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재벌 기업인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부통령을 지낸 정치가였다. 김성수는 1891년 10월21일 전라북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김경중(1863~1945년)과 장흥 고씨 사이의 4남으로 태어났다. 호 ‘인촌’은 태어난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울산 김씨로 하서 김인후의 13대손이다. 위로 세 형이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고 동생 김연수(삼양그룹 창업자)가 있다. 김성수의 어린 시절 이름은 김판석이었다.

김성수 집안은 원래 전남 장성에 자리 잡았으나 김성수의 할아버지 김요협이 전북 고창의 갑부 정계량의 딸에게 장가들면서 고창으로 옮겨 정착했다. 김요협은 정씨 부인과의 사이에 기중·경중 두 아들을 뒀다. 김요협은 기중에게 1000석, 경중에게는 200석의 재산을 물려줬다. 양가는 이를 바탕으로 2만석이 넘는 추수를 할 수 있는 호남의 대부호가 되었다. 김성수가 기업·교육·언론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막후에는 이런 재력의 뒷받침이 있었다.

2000년 4월1일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묘비 제막식이 경기 남양주시에서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을 비롯한 유족과 고려중앙학원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뉴스뱅크이미지
김성수는 세 살 때 자녀가 없는 큰아버지 김기중(1859~1933년)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기중은 진사가 된 뒤 1907년까지 용담(지금의 진안)·평택·동복(지금의 화순) 군수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는 줄포에 영신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펼치기도 했다. 김성수의 생부 김경중은 진산군수를 지냈다. 1907년 <조선사> 17권을 냈고, 유고집 <지산유고(芝山遺稿)>가 있다.

창업자 김성수, 호남의 만석지기 대부호

김성수는 13세 때 다섯 살 위인 창평(지금의 담양군)의 장흥 고씨 고광석과 결혼했다. 김성수는 규장각 직각을 지낸 장인 고정주에게서 신학문과 구학문을 배웠다. 고정주는 고향 담양에 창흥의숙을 열었는데 한문은 물론 영어, 일어, 산수도 가르쳤다. 서울에서 영어교사를 초빙하기도 했다.

1907년 부안 줄포면 줄포리 향제로 이사한 김성수는 1910년 첫 아들 상만을 낳았다. 6년 후 장녀 상옥을 낳고, 2년 후 차남 상기, 이듬해에 쌍동아들인 3남 상선과 4남 상흠을 낳았다. 원래 몸이 가냘프고 약했던 고씨 부인은 산고에 시달리다가 1919년 10월,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김상만은 <일민 김상만 전기>(동아일보사 간행)에서 어머니 고광석에 대해 이렇게 썼다. ‘엄격한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현모양처 교육을 받은 전형적인 조선 여인이었다. 시조부님과 시부모님을 모시는 장손의 며느리로서 쉽지 않은 시집살이에도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은 효부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밝히곤 했다.’

1921년 1월, 김성수는 법정에서 만난 평북 강계 공북면 출신 이아주(1899~1968년)와 두 번째 결혼했다. 법정에서 당당히 소신을 밝히는 이아주에게 반한 김성수가 이아주의 은사 김필례를 통해 청혼해 결혼으로 이어졌다. 당시 김성수는 31세, 이아주는 23세였다. 김성수는 창흥의숙에서 공부할 때 평생의 동반자인 고하 송진우를 만났다. 1908년 김성수와 송진우는 부모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와 더불어 상투를 자르고 찍은 사진을 보낸 뒤 금호학교의 교사 한승복의 주선으로 군산항을 출발해 일본으로 갔다. 도쿄에 도착한 두 사람은 벽초 홍명희의 하숙집을 찾았다. 일본 유학 시절 김성수는 홍명희·이광수·최남선·장덕수·현상윤·최두선·조만식·김병노·조소앙 등과 사귀었다. 1911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진학한 김성수는 1914년 7월 졸업했다.

1914년 일본에서 귀국한 25세의 청년 김성수는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최남선·안재홍 등과 논의해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을 학교를 만들겠다는 염원으로 학교 이름을 ‘백산학교’라고 하고 당국에 인가 신청을 했다. 그러나 이름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인가를 받지 못했다. 중앙학교로 허가를 받은 것은 1915년 4월이었다. 그런 다음 김성수는 한국인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제조공업회사로,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경성직뉴를 인수했다. 1919년 1월에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립했다.

29세에 동아일보 창간…계속 고문직 유지

기업인과 교육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성수가 동아일보 창간을 결심한 것은 1919년이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통치 방식을 강압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꿔 조선인들에게도 민간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겠다고 했다. 당시 김성수는 민립대학인 가칭 한양전문학교 건설 계획을 최두선과 함께 추진하는 중이어서 신문사를 세우는 데 주저했다. 그러나 한말에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유근의 권유와 민족 진영에서 신문 하나는 발행해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가 있어 결심했다.

동아일보라는 제호는 유근이 제안했다. 우리 민족이 발전해 독립을 쟁취하려면 동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삼아야 하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아닌 동아시아의 일원이라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김성수는 1919년 10월9일 동아일보라는 제호로 신문을 발행하겠다는 신청서를 총독부 경무국에 냈다. 총독부에 제출된 10여 건의 허가 신청 중에서 동아일보·조선일보·시사신문 셋만이 허가되었다. 시사신문은 신일본주의를 내걸고 만든 협성구락부의 민원식이 발행인이었다. 조선일보는 대정실업친목회의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한 비정치적인 실업 신문이었다.

서울 화동 138번지 중앙학교 옛 교사에 창립사무소 간판을 내걸고 창간 작업에 들어간 김성수는 1920년 4월1일 동아일보 창간호를 냈다. 당시 동아일보는 20대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청년 신문이었다. 김성수가 29세, 주간 장덕수가 25세, 편집국장 이상협이 27세였다. 그러나 창간 15일 만에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사건 기사를 보도해 발매·배포 금지 처분을 받았다. 김성수가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 사장을 맡은 기간은 4년 5개월이다. 1920년 7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924년 10월부터 1927년 10월까지다. 해방 후에는 1946년 1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사장을 지냈다.

동아일보는 1926년 12월 광화문 사옥으로 이사하고 1926년 11월 이광수가 새 편집국장을 맡아 안정된 기반을 확보했다. 김성수는 동생 김연수가 경영했던 해동은행, 고무신 제조와 무역업을 하는 경성상공회사 등을 합쳐 1930년에 500만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인척들의 재산까지 합치면 1000만원을 동원할 실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등을 겪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강압 통치로 돌아서면서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폐간됐다. 김성수는 해방 이후 미군정의 군정장관 고문 11명 중 한 명으로 위촉되었고 고문회의 의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1일에는 동아일보를 다시 발간했다. 그러나 당시 사장을 맡고 있던 김성수의 평생 동지 송진우는 그해 12월30일 암살됐다.

김성수는 해방 이후 정계로 진출했다. 1946년 10월 간접선거로 실시된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성수는 한민당을 이끌면서 일관되게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에 의한 민족 진영 중심의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기본 목표를 추구했다. 이승만은 재무부장관을 맡으라고 권유했으나 김성수는 거절했다. 1949년 7월, 동아일보 고문으로 추대된 김성수는 사망할 때까지 이 직함을 유지했다.

1951년 5월16일 실시된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당선한 김성수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신체와 안면에 가벼운 마비 증세가 있었다. 뇌혈전증이었다. 8월 중순 스웨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 동래온천에서 온천을 했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김성수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952년 5월2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 이유서를 제출한 김성수는 5월30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의 알선으로 미군 병원선에 입원했다. 1954년 민의원 총선거에서 그가 이끌던 민주국민당이 참패한 후 김성수는 정계에서 손을 뗐다. 1955년 2월 위출혈로 쓰러진 김성수는 장면 박사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였다. 김성수는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55년 2월18일, 65세로 별세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왼쪽)과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1991년 4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신문인협회(IPI) 제4차 연차총회에서 만났다. ⓒ 뉴스뱅크이미지
김상만-김병관-김재호로 장자 승계

김성수는 9남 4녀를 뒀다. 장남 김상만(1910년생), 장녀 김상옥(1916년생), 차남 김상기(1918년생), 3남 김상선·4남 김상흠(1919년생), 차녀 김상숙(1922년생), 5남 김상오(1924년생), 3녀 김상현(1926년생), 6남 김상종(1929년생), 7남 김남(1930년생), 8남 김상석(1933년생), 9남 김상겸(1935년생), 4녀 김순민(1937년생) 등이다. 장남 김상만은 1928년 19세 때 장흥 고씨 집안 고현남과 결혼했다. 조부 김기중이 앞장서서 성사시킨 혼인이었다. 김상만은 일본 중앙대학, 영국 런던 대학교 정경대학,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유학했다. 자녀로는 장남 김병관(1934년생), 장녀 김명의(1939년생), 차녀 김명진(1941년생), 차남 김병건(1943년생), 막내딸 김명초(1946년생) 등을 두었다. 1961년 6월 동아일보 발행인이 된 김상만은 1971년 13대 대표이사 사장, 1977년 2월 회장이 됐다. 1981년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김상만은 1994년 세상을 떠났다. 장남 김병관은 동아일보 회장, 차남 김병건은 동아일보 부사장을 지냈다.

안경희와 결혼한 김병관은 김태령·김재호·김재열 등 2남 1녀를 뒀다. 동아일보의 경영은 김성수의 뒤를 이어 김상만·김병관 사장이 차례로 맡았고, 현 김재호 사장에 이르기까지 장자(長子) 승계 원칙을 지키고 있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장녀 김태령은 일민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다. 장남 김재호는 동아일보사와 채널A의 대표이사다. 그의 부인 이정원은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차녀다. 이한동은 부인 조남숙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뒀다. 김재호가 둘째 사위이고, 첫째 사위는 허태수 GS홈쇼핑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허태수의 큰형이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다. 제일기획 스포츠사업 총괄사장을 맡고 있는 차남 김재열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 이서현과 결혼했다.

김성수의 차남인 김상기 동아일보 전 회장의 장남은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맡았던 고려대 김병국 교수다. 김성수의 5남 김상오의 장남은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병철 고려대 교수다. 김성수의 7남 김남은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지냈다. 김성수의 9남 김상겸 전 대한체육회 부회장의 딸 김수혜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둘째 동생인 정순영 전 현대시멘트그룹 명예회장의 4남 정몽용 성우오토모티브 회장과 결혼했다. 한글학자 이희승은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촌(김성수)과 수당(김연수) 형제분의 우애가 돈독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수당은 인촌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형님은 문화 사업을 하세요. 저는 뒤에서 돈을 대겠습니다’ 하고 말이다.”

동생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해 별도 혼맥 일궈

김성수의 유일한 동생인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자는 1910년 두 살 위인 박하진과 혼인했다. 7남 6녀를 뒀다. 장남 김상준(1918년생), 차남 김상협(1920년생), 3남 김상홍(1923년생), 4남 김상돈(1925년생), 5남 김상하(1926년생), 장녀 김상경(1928년생), 차녀 김상민(1929년생), 3녀 김정애(1932년생), 4녀 김영숙(1935년생), 5녀 김정유(1936년생), 막내딸 김희경(1941년생) 등이다. 장남 김상준은 삼양염업 명예회장을 지냈다. 차남 김상협은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3남 김상홍은 삼양그룹 명예회장을 지냈다. 5남 김상하는 삼양그룹 회장으로 있다. 김상준은 1943년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보사부장관을 지낸 구영숙의 맏딸 구연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김상준-구연성의 장녀 김정원의 남편은 고려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다. 차녀 김정희는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과 결혼했다. 3녀 김정림은 전 문교부장관 윤천주의 장남 윤대근과 결혼했다. 장남 김병휘는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차남 김상협은 의사 김준형의 2남 3녀 가운데 맏딸 김인숙과 연애 결혼했다. 장녀 김명신은 송상현 서울대 법대 교수와 혼인했다. 송상현의 부친은 고하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이다. 3남 고 김상홍 명예회장은 수원 갑부 차준담의 맏딸로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차부영과 결혼해 2남 2녀를 뒀다. 현재 삼양그룹을 이끌고 있는 장남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은 김종규 전 서울신문사 사장의 딸 김유희와, 차남 김량 삼양홀딩스 부회장은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막내딸 장영은과 결혼했다. 장영은의 오빠 장대환은 매일경제신문 창업주인 정진기의 사위다. 현재 매경미디어그룹 회장이다.

5남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은 박상례와 중매 결혼했다. 장남 김원 삼양사 대표이사 부회장은 배영화 전 경희어망 사장의 딸 배주연과 결혼했다. 차남 김정 삼양사 사장의 부인은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딸인 안혜원이다. 외동딸 김영란은 (주)항소 송하철 사장과 혼인했다. 송하철의 부친은 송남석 모나미 회장이다. 김연수의 장녀 김상경은 ‘아폴로박사’ 조경철과 결혼한 후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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