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줄 땐 언제고 음란하다는 거야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5.04.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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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상 받은 웹툰 사이트 레진코믹스 ‘과도한 규제’ 논란

지난 3월24일 누리꾼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인기 유료 웹툰 사이트인 레진코믹스에 대한 접속이 예고도 없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사이트를 클릭한 누리꾼을 맞은 것은 파란 바탕의 ‘warning.or.kr’ 화면이었다. ‘불법·유해 정보 사이트에 대한 차단 안내’라는 문구가 ‘주홍 글씨’로 박혀 있었다. 심의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접속 차단 기준에 대한 문의 및 항의가 온라인상에 빗발쳤다. 결국 두 시간 만에 차단이 풀렸다. 방심위가 접속 차단 결정에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다.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방심위가 별도의 제재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드러나 논란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4월10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박효종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은 “전체 사이트를 차단했다든지 (레진코믹스의) 의견 진술을 청취하지 않은 부분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점은 대단히 죄송하다”면서도 “일본 만화를 그대로 번역한 부분 등은 음란성이 크다는 문제가 있다”며 사업자 의견 진술 청취 후 제재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률상 ‘음란’ 개념 명확히 정의 안 돼

방심위 측에 따르면, 최근 레진코믹스에서 제공하는 일부 일본 성인만화 콘텐츠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방심위는 심의 결과 해당 콘텐츠가 ‘음란물’이라고 판단했다. 성인인증을 바탕으로 서비스가 가능한 ‘19금’ 청소년 유해 매체물을 넘어 일반 성인에게도 서비스가 차단돼야 하는 음란성 콘텐츠라고 봤다. “음란물로 인해 우리 건전한 사회질서 및 정신건강이 피폐해지고, 음란의 수위가 더욱 변태적·폭력적·엽기적인 성으로 변질되고 있는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4월9일 통신심의소위원회)하는 상황을 고려한 결과라는 것이다.

법적 근거는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다. ‘음란한 부호·문언·음향·화상 또는 영상을 배포·판매·임대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하는 내용의 정보’를 불법 정보로 규정해 유통을 금지한다. 방심위는 내부 규칙인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 규정’에서 구체적인 성행위 묘사, 과도한 성기 노출, 가학적 변태 행위, 반윤리적 패륜 소재 등을 ‘불법 정보’ 음란물의 요소로 명시했다. 민원이 제기된 레진코믹스의 일본 성인만화 콘텐츠는 성기 및 성행위를 묘사하는 한편, 계모와의 정사나 배우자의 혼외정사 관음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는 소재를 다루는 등 음란물로 판단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 방심위의 판단이다.

이에 반발하는 여론이 거세다. 문제는 법률상의 ‘음란’ 개념이 명확히 정의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음란한 것은 불법 정보이므로 유통을 금지한다’고 규정하는 수준에 그친다. 이렇듯 모호한 법조문으로 규제 가능성을 열어둔 탓에 처벌해야 할 ‘음란’의 범위를 두고 논란이 발생한다. 레진코믹스 제재 방침에 항의하는 누리꾼 및 일부 전문가, 시민단체 등에서는 방심위의 심의 규정이 사회 일반의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부기관의 자의적 심의 기준으로 인해 개인 표현의 자유 및 콘텐츠 소비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화평론가 박석환 한국영상대 만화창작학과 교수는 문제의 콘텐츠가 규제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때는 그것이 사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미 유사하거나 그 이상 수위의 콘텐츠가 범람해 있는 상황이다. 일반 성인의 관점에서 판단할 때 해당 작품의 수위가 유독 과하다고 볼 수 없다.” 박 교수는 ‘과표현물’과 ‘음란물’을 구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음란물’은 사회 윤리적으로 금지돼야 한다는 가치 판단이 개입된 용어라서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당 작품은 성적 표현 및 묘사가 담긴 ‘과표현물’이긴 하나 그 과도함이 현 사회질서를 해칠 정도로 심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시민단체 오픈넷은 지난 4월13일 발표한 성명에서 방심위 심의는 우리 사법 체계가 인정해온 음란물의 기준에 맞지 않는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 판례 다수를 검토해보면 불법 정보로서의 ‘음란’ 개념을 매우 한정적으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봐서는 안 되고 보여주는 것이 범죄시될 정도로 해악이 명백한 것만을 법원이 ‘음란물’로 판단해왔다는 설명이다. 오픈넷 측은 “방심위가 지금까지 ‘불법 정보’만을 심의한 것이 아니라 ‘건전한 통신윤리의 함양’이라는 추상적인 기준으로 심의를 해왔다”며 “명백한 불법 콘텐츠에 대해서만 중개자에게 제한을 요청할 수 있다고 선언한, 정보 유통자 책임에 관한 국제 원칙인 ‘마닐라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미래부와 방심위의 ‘엇박자’

눈길을 끄는 것은 정부 주무 부처 및 심의기관 사이의 ‘엇박자’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 12월,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는 ‘인터넷 규제 정비 방안’을 발표했다. 미래부·문화부·금융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 등 10개 부처가 합동으로 마련했다. 여기에서는 인터넷 표현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한 관련 규제 철폐가 중요하게 거론됐다. ‘표현의 자유 침해와 제도의 실효성 논란이 있는 콘텐츠 사전 심의 체계를 업계 스스로의 노력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자율 심의 체계로 전환’ ‘인터넷상에서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할 우려가 있는 규제는 정부 입법 활동의 최우선으로 두고 신속히 폐지 또는 보완’ 등이 골자다.

앞서 2013년 5월 발표된 ‘박근혜 정부 국정 과제’에서도 인터넷 생태계 관련 국정 과제 중 하나로 ‘인터넷 표현의 자유 증진’이 강조된 바 있다. 이것이 7개월 후 좀 더 구체화된 정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당시 이진규 미래부 인터넷정책국장은 “정부 중심의 딱딱한 규제 방식에서 벗어나 민간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상호 협력하는 유연한 규제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한편, 국경이 무의미한 인터넷 경제에서 외국과의 규제 형평성도 고려하는 전략적 규제 정책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인 2014년 1월 방심위의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 규정’이 일부 개정됐다. 정부의 규제 완화 철학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규제가 오히려 강화된 것이다. 종전의 음란물 판정 기준이 대부분 유지되는 가운데 일부 항목은 더 엄격해졌다. ‘남녀의 성기, 음모 또는 항문’ 등 신체 부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을 음란물이라고 규정했던 항목에 ‘성적 행위’ 자체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까지 더해진 점이 대표적이다. ‘심의 축소, 민간 자율 규제 강화’라는 정부의 정책 방향과는 달리 관 중심의 심의·규제를 오히려 강화한 꼴이다.

2013년 6월 서비스를 시작한 레진코믹스는 새로운 IT 수익모델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포털 중심의 무료 웹툰 일색이던 시장에 유료화 모델을 안착시키며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 성인물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소재 및 장르, 무료로 일부를 제공한 후 다음 편을 기다리지 않고 보려면 결제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 콘텐츠 생산자에 대한 업계 최고 수준의 대우 등이 바탕이 됐다. 여기에는 정부 지원도 큰 몫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각종 지원금 제공, 미래부의 서버 운용비용 지원 등이다. 지난해에는 미래부가 주관하는 ‘제9회 대한민국인터넷대상’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래부로부터 ‘창조경제 모범 벤처기업’으로 주목받았던 곳이 방심위로부터는 ‘음란물 규제 대상’이 됐다. 박근혜 정부 내부의 진취적 산업 육성 정책과 보수적 윤리관이 극적으로 충돌한 사건이 바로 ‘레진코믹스 사태’인 셈이다.

국회에서도 법 개정 움직임

‘글로벌 스탠더드’는 방심위보다 미래부 쪽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2014년 7월 입법조사 자료에서는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일본 등 주요국의 인터넷 규제 사례에 대해 검토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주요국들은 인터넷에 대해 민간의 자율 규제를 선호하고 있다. 아동·청소년 음란물과 같은 아주 예외적 사항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규제에 소극적이었고, 정보통신망법 제44조의 7과 같이 광범위하게 불법 정보를 규정하고 있는 국가는 찾아볼 수 없다.’ 이들 정부에서는 아동 및 청소년 유해 매체, 아동 포르노 등 악성 음란물, 인종차별 내용 등에 한정해 최소한으로 규제에 나선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일괄적 규제가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도 제도 보완 움직임이 한창이다. 3월26일 정부의 무분별한 인터넷 사이트 접속 차단 권한을 제한하려는 취지의 개정안이 발의됐다. 개정안에서는 방심위의 접속 차단이 법률로 명시한 불법 정보에 대해서만 가능하도록 제한한다. 불법 정보의 범위도 아청법상의 아동·청소년 음란물, 여성가족부가 고시한 청소년 유해 매체물 등으로 한정한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현행 제도는 모호한 규정과 자의적 판단으로 국민이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 미디어 접근권 등을 침해하고 있다. 4월 말 열리는 국회 상임위 소위에서 발의된 개정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레진코믹스 “음란물 판정 수긍 어렵다” 


레진코믹스는 방심위의 판단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성업 레진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이사는 “성인 인증을 바탕으로 적법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작품을 수정했다. 한국적 실정에 맞게 순화하려 노력했다. 성기 등은 최대한 가림 처리했고 지나치게 노골적인 내용의 대사도 곧이곧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작품의 소재 및 상황 설정도 ‘음란물’로 차단될 만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무엇을 음란물로 판단해야 하는지 사회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레진코믹스 측은 번역 서비스한 일본 만화 콘텐츠의 ‘음란성’ 논란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성업 이사는 “온라인 플랫폼 자체를 해외 시장에 수출하려는 사업 전략을 갖고 있다. 단순히 한국 만화를 해외에 공급하는 수준을 넘어, 세계 각국에서 레진코믹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자국 및 타국의 웹툰을 소비하도록 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1차 시장이 일본으로, 이번 달부터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성인만화를 포함해 일본 만화를 국내에 번역 소개한 것은 일본의 시장 관계자들에게 사업 비전을 설득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는 것이다. 레진코믹스는 4월28일 방심위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직전, 적극적으로 회사 측 의견을 진술해 입장을 소명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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