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vs 인도, 지진 구호 ‘쩐의 전쟁’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5.05.0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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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각축장 된 네팔…“지진이 지역 균형에 영향 미칠 것”

“여기! 여기!” “더 줘!”

4월30일 대지진이 발생한 지 6일째, 일본 산케이신문이 전한 네팔 현지 모습은 처참했다. 지원 차량이 다가오자 음식과 물을 찾는 이재민이 몰려들었다. 이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약 100만명이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진 등으로 카트만두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40만명은 시내를 벗어났지만 시 외곽으로 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가까운 공원이나 사원 경내에 텐트를 치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내진 설계도 되어 있지 않고 건축된 지 오래된 카트만두의 건물들은 잔해로 변했다. 그나마 전기와 수도가 서서히 복구되는 것은 다행이었다. 카트만두 시내의 툰디켈 공원은 가장 큰 규모의 피난처로 바뀌었다. 녹색·검정·오렌지색 등 형형색색의 텐트가 군락을 이룬 이곳에는 1만여 명의 이재민이 모여 있다. 지금도 텐트가 속속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오물 등은 구석에 쌓여 있고 쓰레기도 곳곳에 널려 있는 이곳의 생활을 누군들 좋아할 리 없지만, 그렇다고 빠져나갈 방법도 뾰족하게 없는 상황이다. 유엔이 4월29일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네팔의 이재민 중 350만명이 식량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중 140만명은 긴급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4월25일 발생한 네팔 대지진의 영향으로 카트만두의 한 발딩이 기울어져 위험한 상태로 있다. ⓒ AP연합
대지진에 휩쓸린 네팔을 돕기 위해 미국·호주·이스라엘·러시아까지 여러 나라가 다양한 형태로 원조의 손길을 내밀고 나섰다. 특히 열성적인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 외교부는 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인 4월26일 관계 부처와 긴급회의를 열고 네팔 지원을 서두르기로 합의했다. 2000만 위안(약 34억원)의 긴급 물자와 함께 62명의 구조대와 구조견 6마리가 즉각 네팔로 향했다. 이 구조대는 동일본 대지진에도 파견됐던 엘리트 대원들로 구성돼 있다. 2000만 위안의 자금 원조는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약 320만 달러로 미국의 지원금 220만 달러를 웃돈다. 다음 날인 4월27일, 다른 국가에 앞서 현장에 도착한 중국 구조대는 잔해에 묻혀 있던 16세 소년을 구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생존자를 구해냈다.

네팔은 지금까지 인도의 세력권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맨 처음 손을 내민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 외무부의 발 빠른 대처 뒤에는 네팔의 지원 요청이 있었다. 4월27일 네팔 정부의 핵심 관계자는 “중국 정부가 지진에 대해 신속히 지원해준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올해는 양국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다. 이 시기에 발생한 지진은 불행하지만 (이번 지진 복구 지원이) 양국 간 히말라야를 넘는 깊은 우정을 충분히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을 먼저 내밀고 지원에 화답하는 네팔 정부는 이제 인도가 아닌 중국을 택한 것일까. 이런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두고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은 “네팔을 둘러싼 지역 균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우리를 도와달라” 네팔이 손 내민 이유

인도 역시 재빨랐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지난해 5월 취임할 때부터 네팔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인도는 이 지역에서 주도적인 국가로 오랫동안 군림해오고 있었다. 인도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인만 300만명으로 수도인 카트만두의 인구와 비슷하다. 그는 네팔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트위터에 소개하기도 했다. 10여 년 전 인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구자라트 아마다바드에 왔다가, 길을 잃은 네팔 소년 지트 바하두르를 우연히 알게 돼 그가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자신이 후원했다는 이야기를 고백했다. 공식적인 행보도 친(親)네팔에 신경 썼다. 지난해 8월에는 17년 만에 네팔을 방문한 인도 총리가 됐다. 그리고 네팔 의회 연설에서 네팔의 개발 사업을 위해 1000억 네팔 루피(약 1조원)를 차관으로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4월25일 인도 수송기 13대에는 500명의 대원이 탑승했다. 이들은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네팔로 날아가 구호 활동을 전개한 해외 구조대원이 됐다. C130 수송기에는 물과 식량 그리고 의약품 등 43톤의 물자가 가득 실렸다. 물자의 양만큼은 인도가 최대였다. 인도의 네팔 지원 작전명은 ‘우정 작전’이다. 이름 그대로 친밀감을 과시한 지원이었다. 하지만 신속한 대응의 배경에는 친밀감 외에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중국에 대항하는 목적이 있다.

인도와 네팔은 힌두교라는 공통의 종교로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네팔의 정쟁은 인도의 방관을 불러왔다. 전제 정치와 다름없이 굴던 네팔의 마지막 왕 가넨드라는 2006년 4월 국민의 요구에 의해 240년간 이어온 왕족 통치를 끝냈다. 2007년 12월 국민투표에 따라 군주제가 폐지됐는데, 2008년 집권당인 네팔 마오(마오쩌둥)주의 공산당 대표인 프란찬다 총리가 첫 방문지로 인도가 아닌 중국을 택하면서 양국의 정치 교류는 정체됐다.

그런 인도를 자극한 게 중국이었다. 중국이 네팔에 미치는 영향은 인도에 비해서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네팔의 경제는 인도 종속이 심각하다. 석유 수입은 모두 인도를 통하고 있고 수출과 수입의 절반 이상이 인도와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인도의 영향력 강화를 싫어하는 세력은 중국으로의 접근을 도모하고 있다. 2001년 왕궁에서 암살되었다는 비렌드라 전 국왕도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시도했으며, 네팔 경제계도 카트만두에서 직항 노선이 있는 광저우·상하이 등과의 거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특히 네팔 마오주의 공산당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룸비니 개발 사업은 중국의 원조에 의해 진행될 전망이다. 석가모니의 탄생 성지인 룸비니 사업의 중심은 티베트의 성도인 라싸에서 이곳까지 연결되는 철도와 국제공항, 115m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과 특급 호텔, 그리고 국제 불교대학이다.

시진핑의 ‘일대일로’ 중심에 위치한 네팔

철도 연결은 중국 시진핑 체제의 신(新)경제 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의 핵심 사업이다. 칭하이(靑海)성 거얼무(格爾木)와 라싸(拉薩)를 연결하는 철도는 해발 5072m의 고원지대를 통과하기 때문에 ‘하늘길’로 불렸다. 지난해 8월 중국은 이 철도를 라싸에서 티베트 제2의 도시인 르카쩌(日喀則)까지 연장 개통했다. 하지만 중국의 바람은 이것보다 더욱 웅대하다. 2020년까지는 히말라야에 터널을 뚫어 네팔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인도까지 철길을 확장해 ‘실크로드’를 재현하겠다는 게 구체적 계획이다.

중국 서부에서 미개발지로 남아 있는 시짱의 개발을 위해서도, 그리고 중화진흥이라는 꿈을 위해서도 네팔은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놓여 있다. 3월26~29일 하이난(海南)성에서 열린 보아오(博鰲) 포럼 연차총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일대일로’의 시행전략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람 바란 야다브 네팔 대통령과 만나 9억 위안(약 1558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돈은 티베트와 국경을 맞댄 네팔의 코다리와 카트만두를 연결하는 115㎞ 길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운송 인프라를 확충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시 주석 선물의 대가는 네팔이 약 2만명의 망명 티베트인 관리를 철저히 해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피난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8년 3월 라싸에서 발생한 티베트인의 집단 항의 시위 이후 중국은 네팔에 국경 관리를 강화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 네팔은 망명 온 티베트인들의 ‘반(反)중국 시위’를 금지하고 있다.  

현재 네팔에 대한 투자 총액에서 중국은 인도의 상대가 못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내 따라잡을 수 있다. 2012년 중국은 네팔과 16억 달러(약 1조7200억원) 규모의 수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했다. 세계를 뛰어다니며 투자열을 올리는 중국 기업은 네팔 사업에도 적극적이다. 다른 수력발전소 건설에 중국 국영기업들이 참여하고 있고 히말라야를 둘러싼 자동차 도로망을 건설하거나 네팔 국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업도 중국 기업의 몫이다.

그동안 남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접근하면 무덤덤하던 인도가 자극받아 그 나라를 둘러싼 외교 관계가 활성화되는 역사적 반복이 계속돼왔다. 네팔 역시 그런 반복의 대상 중 하나다. 다만 5000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당한 비극의 지역에서 ‘구호’를 둘러싸고 정치가 작동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정당들 분쟁이 지진 피해 키웠다  


이번 지진에서 5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것은 정부의 재해 대책이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네팔은 왕정이 끝나고 2008년 공화정으로 이행된 후에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지 못하는 등 불안정한 정세를 이어오고 있다. 정치의 불안은 행정의 지체로 이어졌다. 이번 지진 피해 현황을 보면 카트만두 시내의 현대적인 건물은 온전하게 유지된 경우가 많았지만 빈곤 지역 민가나 역사적 건축물은 막대한 피해를 입는 등 ‘피해 격차’가 눈에 띈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위치한 고즈넉한 이미지의 네팔이지만 그 역사에는 핏빛이 서려 있다. 네팔에서는 1990년대부터 왕정 타도를 목표로 한 마오주의자와 정부군 간에 내전이 계속됐다. 각 정당은 마오주의자와 평화의 길을 모색했지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정권 교체가 반복됐다. 오랜 내전에서 최소 1만2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토도 내전으로 황폐화됐다.

이런 와중에 입헌군주제에서 정치적 권력을 포기해야 할 가넨드라 국왕은 2005년 직접 통치를 선언하고 정계에 복귀했다. 전제군주정과 다름없는 국왕의 복귀에 정당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결국 2007년 국왕의 정치적 해체를 담은 잠정 헌법을 승인했다. 2008년 마오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제1당이 되면서 왕정은 폐지됐다. 원래 2010년까지 제정될 예정이었던 새 헌법은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평화협상과 신헌법을 둘러싼 정당들의 분쟁에 사회·경제적 활동은 뒷전으로 밀렸다.

정치의 불투명성은 주변국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인도·중국·파키스탄 등 여러 나라는 네팔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지만 예산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의문을 갖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지원은 대부분 사회 인프라 확충을 위해서지만 비포장 일색인 도로 사정만 보더라도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불투명성도 지진 피해를 막대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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