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김고은, 남자를 지배하다
  • 허남웅│영화평론가 ()
  • 승인 2015.05.0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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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 감독의 여성 누아르 영화 <차이나타운>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이 단독 주인공인 작품은 남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에 비해 극히 적은 편이다. 이유가 있다. 흥행을 주도하는 관객층이 20~30대 여성이다 보니 그렇다. 제작사는 이들이 혹할 만한 남자 배우가 등장하는 소재와 장르 영화를 기획하고 만든다.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은 <피도 눈물도 없이>(2002년)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여성 투톱 영화다. 김혜수·김고은이 각각 조직의 보스와 조직원으로 분해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남성 영화 일색인 지금 세대를 대표하는 두 여배우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히 보스와 조직원 사이라고 하기에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보스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김혜수)가 접수하고 있는 지역은 ‘차이나타운’. 엄마에게는 일영(김고은)을 비롯해 몇 명의 아이가 있다. 하지만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을 조직이라는 사업체의 일원으로 다룬다는 인상이 강하다.

영화 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뒷골목 보스로 변신한 배우 김혜수. ⓒ CGV아트하우스 제공
약육강식의 세계 ‘차이나타운’

사실 일영은 버려진 아이였다. 태어나자마자 지하철 ‘10’번 보관함에서 발견돼 이름도 일영이다. 일영은 엄마의 명령에 따라 악성 채무자를 찾아가 빌려준 돈에 고액의 이자까지 뜯어내며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았다. 석현(박보검)은 악성 채무자의 아들이다. 일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인물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셰프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며 밝게 살아간다. 그 모습에 일영은 마음을 뺏기고 그로 인해 엄마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조폭물로 불리는 갱스터 영화의 외피를 두르지만, 결과적으로 일영의 성장물로 기능한다.

<차이나타운>의 원래 제목은 ‘코인 로커 걸’이었다. 소녀(girl)는 어떻게 그 험한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는가. 극 중 차이나타운이 살벌한 곳인 이유는 쓸모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디 차이나타운에만 해당할까. 엄마와 같은 기득권 세력이 장애물처럼 버티고 선 지금 일영과 석현 같은 청년에게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다.

엄마가 일영과 같은 또래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건 이들이 아직 정신적으로 자라지 못해서다. 신체는 건장하고 분노와 반항기가 충만하지만, 그것이 내적으로 고여 있다. 엄마가 말하는 쓸모란 아이들에게는 다름 아닌 생존이다. 이곳에서 사랑 따윈 전혀 쓸모가 없는 행위다.

차이나타운은 수많은 구성원의 욕망이 엇갈린 사선을 그리는 장소다. 원색의 간판이 난무하고 전깃줄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답답한 인상을 주는 건 엄마의 지배 아래서 일영과 같은 자식 세대의 욕망이 발산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다. 석현과의 만남은 일영에게 엄마의 지배를 벗어날, 엄마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구실로 작용한다. 자기 정체성을 찾을 운명 같은 기회다. 일영은 엄마라는 괴물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 괴물에 맞서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날 것인가.

영화 에서 김혜수에게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김고은(오른쪽). ⓒ CGV아트하우스 제공
김혜수의 두둑한 뱃살에서 풍기는 카리스마

<차이나타운>이 품고 있는 살부(殺父) 테마는 이미 장준환 감독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년)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 살부란 아버지를 죽인다는 의미다. 성장한다는 것은 부모를, 어른을 넘어선다는 개념이다. 성장은 남녀 공히 겪어야 할 통과의례다. <차이나타운>이 <화이>와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 건 흠이 아니다. 일영도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엄마를 넘어야 한다. 일영이 엄마와 벌이는 일련의 갈등은 곧 엄마의 젊은 시절 사연이기도 한 셈이다.

핵심은 그 사연, 일영은 ‘어떻게’ 엄마를 넘어설 것인가. <차이나타운>이 여성 캐릭터를 지극히 남성적인 세계에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다. 이의 설득 여부가 <차이나타운>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일영은 남성인 화이와는 어떻게 또 다른 과정을 거쳐 성장할 것인가. 실은 그 차이가 <차이나타운>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이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엄마와 일영 캐릭터에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목격되는 차별점이 거의 없다. 남성을 대리해 그 자리에 서 있다고나 할까.

빳빳하게 머리칼을 세우고 몸에 보형물을 채워 넣어 만든 두둑한 뱃살로 화제를 모은 김혜수의 변신은 확실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차이나타운의 최고 권력자답게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대부>(1972년)의 돈 콜레오네와 같은 전형적인 남성 보스의 모습을 참조한 것처럼 보인다. 한준희 감독은 여성 캐릭터가 차이나타운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는 설정에 대해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한 것 같다. 여자들은 결정적인 순간과 중요한 순간에 변명도 하지 않고 더 강력한 결단을 내린다”고 이유를 밝혔다.

영화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하고 강력한지 구체적으로 설득하지 못한다. 일영이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은 결정적인 이유는 여자답지 않게 폭력을 행사해서다. 그건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차이나타운>처럼 강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영화도 있었고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투톱으로 나선 적도 있지만, 대개는 ‘남성적’ 이야기와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이 사회가 남성 중심의 지배 체계로 형성되고 또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부’라는 주제의식을 고려하면 <차이나타운>의 일영이 넘어서야 할 최종 대상은 엄마가 아닌 남성적인 지배 체계여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차이나타운>의 등장은 분명 환영할 만하다. 전반부 웃음, 후반부 감동이 공식처럼 난무하고 빤한 남자의 사연에 함몰된 작금의 영화계에서 의미 있는 시도다. 오히려 그래서 더 아쉽다. 김혜수·김고은이 한 화면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작품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차이나타운>을 자양분 삼아 여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영화를 더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성과 남성적인 지배를 넘어 여성만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는 진짜 여성 영화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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