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수령’, 국제 무대 데뷔 겁먹었나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
  • 승인 2015.05.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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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불발 배경과 속사정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성사 여부에 국제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지난 4월27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모스크바 당국이 마련한 세계 2차 대전 승전 70주년 행사를 서방 정상들이 보이콧한 것을 비난하는 입장을 밝혔다. “어떤 나라의 정상은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이데올로기 차원의 고려에서, 다른 정상은 ‘1인자’(미국을 지칭)의 지시에 따라, 또 다른 누군가는 겁이 나서 행사 참석을 거부한 것”이란 게 라브로프의 주장이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에 항의한 서방 국가들이 전승 행사에 대거 불참한 데 따른 반발이었다. 초청장을 받은 68개국 정상 가운데 25개국만이 참석 의사를 밝혔을 정도로 분위기는 썰렁했다. 그나마 흥행 보증수표로 간주된 김정은의 참석이 남은 위안이었다. 2011년 말 집권 이후 처음 국제 무대에 데뷔하는 김 위원장에게 관심이 쏠리면 행사 분위기가 달아오를 것이란 기대에서였다.

ⓒ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방문에 흥행 기대했던 러시아 당혹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 뒤 타스통신은 “김정은 불참”을 긴급 뉴스로 타전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통령실(크렘린궁) 공보수석은 “김 위원장은 평양에 남기로 결정했다”며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이 같은 결정이 전달됐다”고 전했다. 믿었던 김정은마저 불참을 통보하면서 러시아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푸틴 대통령의 외교담당 보좌관인 유리 우샤코프가 직접 나서 “여러 북한 인사들과의 접촉에서 김정은이 모스크바에 올 것이란 확신을 받았다”고 공언했고, 라브로프 외교장관과 알렌산드로 티모닌 주한 러시아 대사 등도 김정은 방러를 기정사실로 언급했다는 점에서다.

김정은의 모스크바 방문이 무산되자 갖가지 추측과 분석이 대두했다. 러시아 정부와 고위 인사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은 탓이다. 페스코프 공보수석은 “북한의 내부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고만 말했다. 라브로프 외교장관의 주장대로라면 북한이 겁이 났기 때문이거나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의도로 불참한 것이란 해석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도 침묵하면서 속사정은 베일에 싸여버렸다.

김정은이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우선 다자 외교 무대 등장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첫 해외 방문지로 여러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를 택한다는 건 모험일 수 있다. 자칫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 체제의 초라한 현주소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얘기다. 일부 정상들이 “김정은과 악수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등 거부감을 보인 것도 평양 측을 변심케 했을 수 있다.

전통적인 후견국인 중국을 제쳐놓고 김 위원장이 러시아와 첫 정상회담을 할 경우 떠안을 부담도 고려했을 수 있다. 집권 초기부터 핵실험 강행이나 장거리 미사일 도발로 시진핑 체제의 중국 지도부 심기를 건드려놓은 상황이라 더 이상의 관계 악화는 부담일 것이란 측면에서다. 면밀한 손익 계산 끝에 아무래도 베이징을 먼저 거친 다음 모스크바를 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

경제 협력이나 군사 협력 같은 실익이란 측면에서 양측이 조율에 실패했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러시아 측은 ‘대북 무상 지원은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는 4월 말 평양에서 열린 7차 북·러 경제협력위원회 테이블에서도 현실화했다. 러시아 측은 밀 5만톤 제공과 관련해 “대북 곡물 지원은 차관 형식으로 이뤄져야 하며 절대 무상 원조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북 경협을 총괄하는 알렉산드르 갈루슈카 극동개발장관은 러시아의 투자에 대해 북한이 석탄·마그네사이트 등 광물 개발권을 내놓는 주고받기식 협력이 돼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일각에서 김정은의 불참이 북한의 러시아제 방공 미사일 S-300 도입 불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물물교환 방식 무기 거래 요구에 러시아 측이 경화 결제(현금 거래)를 요구하면서 파국을 맞았다는 것이다.

과거 중국·러시아 깜짝 방문으로 세계적 이목을 한 몸에 받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벤치마킹하려던 김정은이 자신의 방러가 일찌감치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마음을 바꾼 것이란 말도 나온다. 북한 측이 경호 문제 등을 특별하게 요구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소문도 외교가에서 나온다. 애초 김정은이 방문할 계획은 없었고,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하는 쪽으로 결정됐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 고위 당국자들이 김정은을 여러 차례 지목해 방러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리나라 대북 부처 담당자는 “분명히 김정은의 방문과 관련한 조율이 북·러 간에 있었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김 위원장의 방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국회 정보위에 보고한 것도 이런 정황을 포착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모스크바 당국은 김정은의 행사 불참에도 북·러 관계에 이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진화에 나섰다. 북한도 관영 매체를 통해 러시아 측의 전승 70주년 행사를 상세히 보도하는 등 차분한 분위기다. 양측이 불편하거나 냉랭한 분위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관측이다. 그렇지만 김정은의 방러를 계기로 대북 영향력을 복원하고, 한반도 관련 발언권을 강화하려던 푸틴의 구상이 차질을 빚게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무래도 북·러 관계가 당분간은 탄력을 받기 어렵게 됐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김정은의 은둔도 상당 기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김정은은 2013년 10월 평양을 방문했던 차히야 엘벡도르지 몽골 대통령도 만나지 않았다. 집권 4년 차를 맞는 동안 단 한 번도 외국 국가원수와 정상회담을 하지 못하는 외교적 고립 상황이 장기화할 수 있는 상황이다.

김정은의 행보가 다시 주목받게 됐다. 모스크바에 대한 구애를 잠시 거두고 다시 베이징으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쿠바와의 관계 개선과 이란 핵 협상 타결 등 외교 성과에 탄력을 받은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로선 북한에 유연한 입장을 보일 상황이 아닌 듯하다. 사면초가 상태인 북한이 박근혜 정부와의 전술적인 대화 국면 조성 등 유화 제스처로 돌파구를 모색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선 김정은 위원장이 다시 도발 국면으로 돌아섬으로써 긴장 조성을 통한 협상력 강화를 시도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러시아 방문이 불발된 직후 김정은이 자신의 집무실 가까운 곳에 새로 건설한 장거리 로켓 지휘소를 방문한 건 ‘도발의 전주곡’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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