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남편은 야근이었어요”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5.05.1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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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2일 일기 수집’ 행사 시민이 만드는 ‘온라인 타임캡슐’

1937년 5월12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는 영국 국왕 조지 6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영국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는 화려한 의전 및 예식이 펼쳐졌다. 이날 현장에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찍은 작품 <조지 6세 대관식>에는 호화로운 대관식 광경이 담기지 않았다. 대신 행사를 바라보는 남녀노소 시민들의 다양한 표정들이 담겼다. 브레송에게는 대관식의 주인공인 국왕만큼이나 거리를 메운 영국 시민들의 생동감 넘치는 반응이 중요했다. ‘보도사진의 대가’로 명성을 떨친 그가 역사를 기록하는 한 방식이었다.

당시 영국의 인류학자들도 브레송과 비슷한 발상을 했다. 조지 6세 같은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사소하고 평범한 기록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7년부터 1955년까지 진행된 ‘일상 기록화 프로젝트’다. 장장 18년에 걸쳐 수집된 500여 명의 개인 기록은 주제별·개인별 분류를 거쳐 전쟁·여성·교육 등 당시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2010년 영국 서섹스 대학은 50년 전의 프로젝트를 부활시킨 ‘5월12일 일기 수집 이벤트’를 시작했다. 매년 5월12일 수집되는 일기는 국가문화예술유산으로 인정받는 한편, 현대 영국 시민들의 삶과 문화를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 인간과 기억 아카이브
자필 기록부터 ‘동영상 일기’까지 다양

2013년부터 한국에서도 동일한 취지의 행사가 기획되기 시작됐다. 사단법인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이 설립한 ‘인간과 기억 아카이브’가 ‘5월12일 일기 컬렉션’을 구축하면서다. 매년 5월12일 시민들이 쓴 일기를 수집하는 작업이 올해로 3회째를 맞았다. 수집 기간은 5월12일부터 31일까지다. 행사 진행을 담당하는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최효진 선임연구원은 “우리에게 5월12일은 공휴일이나 공식 기념일이 아닌 ‘사소한 날짜’다. 시민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을 수집할 수 있을 듯해 영국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밝혔다.

2013년 579건, 2014년 927건 등 수집되는 일기 수는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미취학 아동부터 청소년, 대학생, 직장인, 전업주부, 은퇴 노인 등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온라인 홈페이지에 일기를 업로드하거나 우편·팩스 등으로 실물 자료를 보내는 식이다. 지난 2년간 수집된 결과를 돌아보면 자필 일기, 컴퓨터 문서파일 일기 등 텍스트로 작성된 일기의 비중이 가장 컸다. 이와 함께 사진이나 편집 이미지, 음성 및 동영상, SNS 화면 캡처 등 다양한 형식의 ‘디지털 일기’도 함께 수집됐다.

시민들이 보내온 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를 꼽자면 ‘가족’이다. 한 74세 남성은 어버이날 10명의 식구들과 자택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감사한 마음과 또한 허탈한 심정을 갖게 되는 양면성을 어찌 표현할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32세 ‘워킹맘’은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며 분주했던 하루 일상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대로 기록했다. ‘남편이 바빠 제대로 쉬지도 못한 휴일을 보낸 이후의 월요일’이었던 지난해 5월12일, 그날도 남편은 야근이었다. 퇴근 후 아이와 함께 남편을 기다리다 결국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하루였다.

친구나 지인과 보낸 시간도 시민들의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25세의 여성 회사원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보낸 하루를 자필 일기와 사진으로 기록했다. 당대의 젊은 여성이 어떻게 여가를 보냈는지가 드러난다. 7세 유치원생 소년은 친구와 장난감을 갖고 놀았던 하루를 크레파스로 그려 보냈다. 장난감을 크게 과장해 그린 데서 어린이 특유의 상상력이 느껴진다. SNS에서 유통되는 콘텐츠 중 인기가 높은 것이 ‘음식 사진’인 만큼, 5월12일에 먹은 음식에 대한 ‘인증샷’으로 하루 기록을 갈음한 시민도 상당수다. 연인과의 SNS 대화 캡처, 딸과의 통화 내용 녹취파일 등으로 특별한 사람과의 ‘순간’을 기록해두고자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일기로 풀어놓는 사례도 많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내면의 감정을 토로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군인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오지 않아 우울했다는 일기, 이별 후 일주일이 지난 때 담담히 마음을 정리하는 일기, 헤어진 연인과의 사진첩을 정리하며 ‘내년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을지’ 궁금해하는 일기 등이다. 대학 입시, 취업, 유학 등 진로에 대한 고민과 자기 다짐을 솔직하게 표현한 일기들도 눈에 띈다. 1년 후 5월12일 자신의 삶과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하는 반응들이 많다.

‘인간과 기억 아카이브’가 마련한 온라인기록관. 일기 기증자는 이곳을 방문해 자신의 일기를 찾아볼 수 있다. 기증자가 동의한 기록물은 외부인도 열람이 가능하다.
“21세기 시민의 일상 고증하는 자료 될 것”

수집된 모든 일기는 디지털화한 후 분류와 목록화 작업을 거친다. 그 후 ‘인간과 기억 아카이브’가 마련한 서고 및 저장소에 보관된다. 콘텐츠 공개에 동의한 일기의 경우 온라인기록관에 전시돼 검색·열람이 가능하게 된다. 행사에 참여한 시민에게는 온라인 공간에 언제든 열어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 생기는 셈이다. 수집된 일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시민의 일상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는 ‘역사’로 기록된다. 역사학·인류학·언어학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의 연구 자료 및 전시·출판 등의 문화 콘텐츠로 활용될 계획이다.

최초로 행사를 제안한 임진희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평범한 이웃의 기록은 먼 훗날 이 시대를 살아간 대한민국 시민들의 일상을 고증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효진 선임연구원은 “공공 부문 기록 관리에 비해 개인·가족·동호회 등이 소장한 일기, 편지, 가족 앨범 등 민간 부문 기록 관리는 활성화가 더딘 실정이다. 매년 열리는 일기 수집 행사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기록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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