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흙집에서 야권 재편 연기 피어오른다
  • 전남 강진=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5.05.1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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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고문 찾아 정치인·취재진·지지자들 발길 ‘러시’

“이제 정치부 기자 만날 일 없다.” 지난해 11월26일 전남 강진의 흙집을 찾은 기자에게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건넨 말이다. 이미 정계를 떠났으므로 정치권 및 시국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내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로부터 약 6개월이 흐른 지난 5월12일, 기자는 다시 전남 강진의 흙집을 찾았다. 손 전 고문이 거처 중인 흙집을 가려면 백련사를 지나 뒤편으로 올라가야 한다. 절 뒤편의 흙집으로 향하려는 기자를 백련사 관계자가 만류했다. “손 전 고문이 불쑥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은거 생활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특히 정치인과 기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가 강하시다. 손 전 고문과 매일 점심 공양을 함께 하는 큰스님으로부터 외부인을 (흙집 쪽으로) 절대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으니 돌아가달라.”

5월10일 손학규 전 고문의 지지자 80여 명이 흙집을 찾아 손 전 고문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 연합뉴스
친노 견제 ‘구심점’으로 호남에서 주목

6개월 전에 비해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취재진의 접촉을 피하려는 완강한 의사가 느껴졌다. 마냥 고집하기만은 어려워 대신 백련사 관계자들에게 손 전 고문의 근황을 물었다. “읍내에서 열리는 5일장에 잠시 들르거나 지인의 경조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깥 출타가 거의 없다. 흙집에 머무르다 점심에 절에 내려와 식사를 한 후 산행을 하는 식으로 하루를 보낸다.” 절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라고 권해도 극구 사양할 만큼 현실에 거리를 두려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매일 점심을 함께 하는 큰스님과도 세상(정치)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야에 묻힌 손학규 전 고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지만 그를 향한 정치권의 관심은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야권 정치인 및 지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계파를 가리지 않고 손 전 고문과의 만남을 청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손 전 고문이 지닌 정치적 자산, 당내 권력 구도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을 고려할 때 그를 향한 ‘러브콜’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4·29 재보선 참패 전후로 불거진 새정치민주연합 내분 사태가 장외에 있는 손 전 고문의 정치적 주가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고 있다.

최근 신임 원내대표에 선출된 이종걸 의원이 지난 4월 말 직접 강진으로 내려가 손 전 고문을 만난 사실이 알려졌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손학규계 의원들의 지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이 만남이 경선 과정에서 손학규계 의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의 측근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이 의원 개인을 보고 지지할 만한 표심은 불과 10여 표를 넘지 못한다. 원내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던 이 의원이 결선투표에서 60표를 훌쩍 넘기는 이변을 일으킨 원동력은 결국 ‘비노(非盧)’ 의원 다수의 결집”이라고 말했다. 손학규계를 포함한 다양한 계파의 비노 성향 의원들이 친노 견제 차원에서 이종걸 의원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손학규계의 ‘보스’를 넘어, 비노 진영 전체의 구심점으로 손학규 전 고문은 매력적인 카드다. 손 전 고문은 2012년 대선 후보 경선 국면에서 ‘친노 패권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친노 세력을 향한 문제의식이 분명하면서도 내부의 다양한 계파를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정치연합의 한 핵심 당직자는 “현재 비노와 친노의 극한 대립은 완충지대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런 역할을 원래 원로 그룹이 해줘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동교동계 등이 분란의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원로 격 인사가 손 전 고문”이라고 말했다. 중도 성향이 강하고 계파 색채도 옅어 당내 갈등을 완충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호남 출신 정치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다. 지난해 말 박지원 의원이 강진을 방문하려 했으나 손 전 고문 측이 정중히 거절한 바 있다. ‘호남 정치 복원’을 내건 천정배 의원도 최근 만남 의사를 간접적으로 손 전 고문 측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천 의원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회가 되면 손 전 고문과 인사도 드리고 만날 것”이라며 “새정치연합에서 어떤 분은 너무 책임을 안 져서 문제인데 손 전 고문은 너무 세게 책임을 지는 것 같다. 야당을 위해 할 일이 많은 분이다. 어려울 때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7·30 재보선 패배로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물러난 이후 비노 진영을 아우를 수 있는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손 전 고문의 주가를 치솟게 하는 요인이다. 지난해 말 박영선 의원이 강진을 찾아 손 전 고문을 만나고 돌아가기도 했다. 최근에는 안철수 의원도 손 전 고문과의 만남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 의원 측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 의원 역시 손 전 고문에게 손을 내밀 이유가 충분하다는 얘기가 당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나온다. 2012년 대선 후보 경선 및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각각 ‘친노 패권주의’를 비판했던 두 사람이다. 실제로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 캠프에 손학규계 인사 다수가 몸담기도 했다. 비슷한 정치적 DNA를 공유한 만큼 ‘손-안’ 연대 가능성이 거론된다.

“문재인, 대권 가려면 손학규를 잡아야”

손학규 전 고문의 존재감은 시사저널이 이번에 실시한 ‘호남 민심’ 여론조사 결과로도 확인된다. 차기 대선 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손 전 고문은 22.4%로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야권의 유력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빅3’(박원순·문재인·안철수)를 모두 제치는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야권의 주요 대선 주자 중 호남 출신 인사가 없는 상황인 만큼, 영남 출신 ‘빅3’가 아닌 수도권 출신 손 전 고문에 지지가 쏠린 점도 눈길을 끈다. 정계 은퇴 후 특별한 연고가 없는 전남 강진에 눌러앉은 것이 결과적으로 호남 민심의 향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손 전 고문은 ‘호남 신당이 창당된다면 꼭 참여했으면 하는 인사가 누구냐’라는 질문에서도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30.6%의 지지를 얻어 26.8%의 안철수 의원을 제쳤다. 신당을 원하는 호남 유권자들이 그 중심에 호남 정치인이 아닌, 전국적 영향력을 지닌 유력 인사를 원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친노 세력이 헤게모니를 쥔 현 새정치연합에 반감을 지닌 호남 신당 지지자들은 그 구심점으로 ‘전국구 인물’, 특히 손 전 고문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

손 전 고문을 향한 호남 민심이 예상 이상으로 뜨거운 것으로 드러난 만큼 야권 내에서 손 전 고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친노 세력에도 마찬가지다. 야권 일각에서는 “문재인 대표 체제가 현재의 위기를 넘어서려면 반드시 손학규를 잡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손 전 고문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친노 대 비노로 날이 선 당내 갈등을 완화하는 한편, 동요하는 호남 민심도 어느 정도 수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손 전 고문은 현 지도부에 꼭 필요한 카드이기도 하다. 새정치연합은 이번 재보선에서 수도권 3곳 모두 패배했다. 내년 총선에서의 수도권 경쟁력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손 전 고문은 지난 2007년 야당에 합류한 이래 치른 각종 선거에서 수도권 공략의 선봉장이었다. 수도권 출신에 경기도지사를 역임한 경력 등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야당의 수도권 싸움을 이끌었다. 당 대표를 맡았던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 출마하며 수도권 선거전을 진두지휘했다. 2011년 4·27 재보선에서는 여당 우세 지역인 경기 성남 분당 을 지역구에서 당선하며 경쟁력을 입증했다. 지난해 7·30 재보선에서도 자신의 ‘마지막 선거구’라는 각오를 밝히며 보수의 텃밭인 경기 수원 병에 출마한 바 있다.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서 대중성을 지닌 손 전 고문을 대체할 만큼 경쟁력을 갖춘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손 전 고문 자신도 승산이 크지 않은 지역구에 도전적으로 출마하는 것을 스스로의 정치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방편으로 활용해왔다. 내년 총선 승리를 통해 대권 행보에 박차를 가하려는 문 대표에게 손 전 고문은 꼭 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인물인 셈이다. 이미 지난 2월 문 대표가 강진을 방문하려 했으나 손 전 고문의 고사로 무산된 바 있다.

손학규 전 고문이 2006년 9월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섰을 당시 김지하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내년 총선 과정에서 존재감 높일 가능성

결국 친노를 견제하기 위해 결집 움직임을 보이는 비노 세력에도, 현 갈등 국면을 수습하고 당내 리더십을 확보하려는 친노 세력에도 손학규 전 고문은 중요한 전략적 교두보에 해당한다. ‘정치인 손학규’에게는 기회다. 현재의 계파 갈등 국면에서 중도 실용의 정체성을 내걸고 운신의 폭을 확보한 뒤, 당내 갈등 수습 및 내년 총선 과정에서 존재감을 드높이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를 지지하는 호남 민심이 상당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차기 대권을 노린 전략적 행보를 이어갈 수도 있다.

최근 손 전 고문이 분당의 자택을 서울 종로의 구기동으로 옮긴 것을 두고 정치적 행보를 재개하려는 수순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손 전 고문의 한 측근은 “2011년 재보선을 앞두고 분당으로 이사한 후 2년 단위의 전세계약이 두 차례 만료됐다. 재계약을 하려니 임대료도 부담이고 빈집을 대신 관리하는 자식들이 오가기에도 번거롭다. 그래서 딸이 거주하는 구기동 쪽으로 집을 옮긴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인이나 지지자와의 만남 역시 예고 없이 마주친 이들을 차마 내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아선 정계 복귀 가능성에 거리를 두려는 모양새다. ‘몸값’이 치솟는 지금, 손 전 고문의 심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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