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숙청 드라마’ 다음 타깃은?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
  • 승인 2015.05.1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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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주장하는 ‘현영철 총살’ 미스터리

반국가 혐의를 쓴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출당(黜黨)이 결정된 2013년 12월8일 노동당 전원회의. 만장일치로 제명이 결정되자 군관들이 달려들어 장성택을 전격 체포했다. 67세의 장 부위원장은 충격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든 듯 손으로 테이블을 겨우 집고 몸을 일으켜세웠다. 바로 앞줄에 앉은 군부 실세 현영철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최고 지도자인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고모부이자 후견인 자격으로, ‘1번 동지’라 불리며 승승장구한 장성택의 몰락은 쇼크였기 때문이다. 나흘 후 장성택은 사형당했다.

한·미 정보 당국 대북 감시망에 포착

지난 2월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 ⓒ 조선중앙통신
그런데 지난 4월 말 평양에서 또 한 번의 피의 숙청이 이뤄졌다는 국정원의 보고가 나왔다. 그 대상은 놀랍게도 군부 2인자로 알려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라는 것이다. 국정원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그는 1년 4개월 만에 장성택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며 몰락한 셈이다. 국정원 보고에 따르면, 강건종합군관학교에서 이뤄진 처형은 잔혹했다. 전투헬기 등 저공 비행하는 항공기를 격추하는 데 사용되는 고사총을 난사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훼손된 시신은 수습이 힘들 정도였다고 했다. 더욱 잔혹한 것은 현영철의 부인과 자녀 등은 물론 형의 후광을 뒷심으로 군부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남동생 현영도와 그의 가족들도 이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한·미 정보 당국의 대북 감시망에 고스란히 포착됐다고 한다.

국정원은 다양한 첩보 분석을 통해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4월30일께 처형됐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자 지난 5월9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안보 관계 장관회의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3일에는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이 국회 정보위원회 소집을 요청해 모두 11쪽에 이르는 자료와 함께 관련 내용을 브리핑했다. 현영철 처형 소식은 국내뿐 아니라 외신을 통해서도 긴급 타전됐다. 관심은 온통 현영철 숙청의 속사정과 집권 4년 차에 접어든 김정은 정권의 행로에 쏠렸다.

국정원은 현영철 숙청 사유에 대해 “김정은에 대한 불만 표출과 수차례의 지시 불이행, 김정은이 주재한 회의에서의 조는 모습 등 불충스러운 모습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4월 말 평양에서 열린 군 훈련일꾼대회에서 조는 현영철의 모습이 담긴 로동신문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군부 2인자의 처형 이유치고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최근까지 현영철의 모습이 계속 북한 관영 매체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처형이 사실이 아닐 것”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영철이 숙청된 날짜로 알려진 4월30일 이후 김정은의 군부대 현지지도는 7차례 있었는데, 그 수행자 명단에서 현영철은 모두 빠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처형이 되었든 아니든, 뭔가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북한 전문가들은 2011년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27세에 절대 권력을 거머쥔 김정은에게서 문제점을 찾는다. 노(老)간부들에게 ‘어린 지도자’로 무시당한다는 콤플렉스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정보 당국은 그동안 북한 TV 영상 등을 분석해, 김정은이 수행하는 고령의 노동당·군부 간부들에게 욕설까지 퍼붓는 등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는 점을 포착했다. 북한은 목소리를 내보내지 않았지만 입술 모양으로 어떤 말을 하는지를 알아내는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간부들이 자신을 얕본다거나 앞에서는 충성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모반을 꿈꾸고 불평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본보기식 처형을 하는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공포 정치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나가겠다는 의도다. 이런 스타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집권 초기 군부 원로에 대해 벤츠 승용차와 고급 특각(별장) 등을 선물하며 환심을 사 권력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싱가포르에서 장성택의 해외 자금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다 한국으로 망명한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정일의 경우 군부 원로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회의 석상에서 하품을 크게 해도 그냥 넘기거나 농담으로 좌중을 웃기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호탕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은 김정은이 간부들의 말대꾸나 졸음에 유난히 민감하게 대응한다는 우리 정보 당국의 분석 결과를 공개하기도 했다.

4월24일과 25일 인민군 훈련일꾼대회에서 눈을 감고 있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왼쪽 원 안). 국정원은 이 사진 속의 현영철이 졸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군부 2인자 처형 사유치곤 신빙성 떨어져”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단순히 졸음만을 이유로 군 실세인 현영철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정책상의 과오나 돌이키기 힘든 실수를 저지르는 등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얘기다. 따라서 지난 3월 러시아 방문 때 첨단 무기 도입이 좌절되는 등 군사외교 실책의 책임을 물은 것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국정원이 처형 집행 날짜로 밝히고 있는 4월30일이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계획이 취소된 날이라는 점 때문에 방러와 연관됐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되던 2010년 가을 군 대장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한 현영철이 결국 다른 경쟁 세력에게 밀려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장성택 처형에 앞장선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등과 광범위한 검열 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꼬투리가 잡혔을 것이란 얘기다.

평양에서는 현재 피의 숙청이 지속되고 있다. 김정은의 건설책사로 잘나가던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이 지난해 11월 평양 순안공항 부실 공사 책임을 지고 가족과 함께 양강도 지역 농장원으로 배치되는 등 김정은 집권 이후 70여 명의 핵심 간부가 숙청됐다고 한다. 금고지기 역할을 해온 한광상 노동당 재정경리부장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이 권력안정에 집착하다 보니 자신이 믿고 기용한 측근 실세까지도 무자비하게 공개 처형한다는 분석이다. 장성택 숙청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동안 김정은 체제에 대해 “예상보다 안정적”이라고 밝혀온 우리 정부 당국의 평가에도 다소 수정이 가해질 분위기다. 당장 북한 핵심 고위층 사이에서 김정은의 리더십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대두하고 있다는 첩보가 잇따르고 있다. 간부들이 현영철 처형을 접한 후 공포와 분노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충성 유도나 체제 결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결국 파워엘리트들의 반발이나 불만을 불러 권력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란 진단도 나온다.

김정은 체제는 당분간 최룡해 당 비서와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노동당과 군부를 나눠 관할하는 체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이들도 무자비한 숙청의 칼날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김정은이 믿고 의지할 노련한 당·정·군 간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공백을 타고 여동생인 김여정 당 부부장이 핵심으로 더욱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무자비한 숙청은 결국 김정은 체제의 이미지 훼손과 북한 인권에 대한 대북 압박을 자초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자칫 ‘아프리카의 학살자’로 불린 독재자 이디 아민(전 우간다 대통령)처럼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될 수 있다”(최진욱 통일연구원장)는 분석도 제기된다. 북한 권력 내부가 꽁꽁 얼어붙고 서해 북방한계선상(NLL) 인근 수역에서의 포 사격 등 도발 국면이 이어지면서 남북 관계도 풀리기 쉽지 않게 됐다. 광복 70주년를 맞아 남북 간 문화 교류 등으로 돌파구를 찾아보려던 박근혜 정부의 대북 구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 AP 연합
현영철(오른쪽 사진)이 공개 처형됐다는 국정원의 보고에 대해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만약 현영철이 4월30일께 간부들 앞에서 공개 처형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후 북한 TV의 기록영화에서 현영철의 얼굴이 삭제되었어야 하지만, 현영철의 얼굴은 5월5일부터 12일까지 매일 북한 TV에 나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사실일 가능성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는 “국정원 관계자도 ‘처형을 단정할 수는 없다. 북한이 발표를 안 했고 현영철이 기록영화에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다수 국내 언론과 외신이 현영철 ‘처형’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 실장은 북한의 핵심 권력 엘리트 변동을 파악하는 데에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특정 엘리트가 반드시 참석해야 할 행사들에 계속 불참하는 경우 건강상 문제 또는 해임이나 숙청 가능성이 있어 주목을 하고, 특정 엘리트가 숙청되었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그에 대한 북한 매체의 보도에 변화가 있는지 분석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김정은 관련 기록영화에서 특정 엘리트가 동행한 모습이 지워지면 그때는 숙청 가능성을 높게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은 기록영화에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런 기본 원칙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 실장은 “북한 로동신문 4월30일자 2면에는 현영철이 인민군 제5차 훈련일꾼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모란봉악단 공연을 리영길 총참모장과 함께 보았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그렇다면 적어도 29일까지는 현영철이 불경죄로 체포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현영철이 30일에 전격적으로 체포돼 곧바로 공개 처형되었다는 말인데 김정은 암살을 시도한 것도 아닌 그를 갑자기 그렇게 서둘러 처형했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의아해했다. 그는 “과거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나 리영호 총참모장의 경우 숙청 전이나 후, 일주일 이내에 그의 이름이 북한 매체에서 완전히 사라진 점과 비교해봐도 지금 현영철의 경우는 예전의 사례와는 다른 것이어서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공식적인 발표를 하기 전까지는 현영철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감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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