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문 닫고, 건물은 경매로 뺏기고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5.05.1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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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폐업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 기관 ‘갑질’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중소기업 ‘현우’의 기술연구소. 현우는 20년 이상 병마개를 제조해온 회사이고, 박승원 사장은 이 건물을 사무실 겸 연구소로 쓰고 있었다. 건물 2층과 3층에는 수천 병에 달하는 국내외 술과 병마개가 전시돼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대량 생산하기 시작한 막걸리 병부터 최근 출시된 각종 주류까지 그야말로 국내 주류의 역사를 이 연구소에서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사장은 “대기업 주류회사도 소장하지 못한 제품이 이곳에 있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최근 회사 문을 닫고, 아내 명의의 이 건물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지게 된 빚을 갚지 못해,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충청북도 진천에 있는 공장도 얼마 전 경매로 다른 사람에게 팔려 넘어갔다. 박 사장의 회사가 어려워지게 된 사연은 2년 전 매일경제·동아일보 등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재산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더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됐다.

5월6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현우기술연구소 박승원 사장이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막걸리 병뚜껑 만들다 망해

박 사장은 경복고와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다 1989년 현우기술연구소를 설립한 후 막걸리 알루미늄 병뚜껑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막걸리 발효 가스의 90%가 마개 밖으로 새나가도록 해 막걸리가 부패하지 않으면서 신선한 맛이 유지되는 병마개 기술을 개발해 2000년 특허도 받았다. 전국 막걸리 제조장의 70%에 병뚜껑을 공급해 2012년 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국세청이 막걸리 시장의 탈세를 막겠다고 관리·감독에 나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2013년 2월 기획재정부는 소주·맥주와 마찬가지로 막걸리도 국세청이 병뚜껑 제조업체를 지정하도록 주세법 시행규칙을 개정했다. 매출이 급증하고 있는 막걸리 제조업자들의 탈세를 막는다는 취지였다. 국세청은 2014년 1월1일부로 막걸리 병마개 제조업체를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국세청의 의도는 이해가 됐지만, 국세청이 내건 조건이 문제였다. 국세청은 자회사이자 국세청 출신 고위직들이 임원으로 있던 병뚜껑 제조업체인 삼화왕관의 기준에 맞게끔 설비를 갖춰야 업체 지정을 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맞추는 것은 중소기업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세청 지정을 받으려면 알루미늄 병마개에 납세증지를 인쇄하는 설비를 구입해야 하는데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국세청의 요구 조건을 맞춰야만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알루미늄보다 증지 인쇄 설비 값이 싼 플라스틱 병마개로 전환하고 국세청에 병마개 제조업체 지정을 신청했다. 12억원의 은행 대출을 받아 플라스틱 병마개 제조 설비와 증지 인쇄 설비를 사들였다. 플라스틱 병마개를 열심히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화왕관 등 대기업들은 현우기술보다 더 싼 값에 플라스틱 원료를 공급받고 있었고 제조 설비의 성능도 우수했다. 현우기술이 가진 설비의 하루 생산량은 30만개인데 삼화왕관은 고성능 설비로 하루 200만개씩 생산했다. 경쟁이 되지 않았다. 거래처를 하나둘 삼화왕관 등에 빼앗겼다.

기계 설비를 갖추는 과정에서 대출을 받은 박 사장은 대출 이자조차 갚을 수 없었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본사 건물과 충북 진천군에 있는 제조공장이 경매에 넘어갔다.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동안 박 사장은 청와대·법제처·기재부·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 등 정부 부처와 여야 의원실을 찾아다니며 파산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경매 절차가 계속됐다. 경매 과정에서 박 사장은 더욱 좌절했다. 경매 절차가 일방적으로 채권추심회사에 유리하게끔 진행됐기 때문이다.

현우 본사 건물 ⓒ 시사저널 임준선
채권추심회사에 유리하게 경매 진행

박 사장이 빚을 졌던 은행은 채권을 일본계 부실채권정리회사(NPL)에 팔았다. 이 회사는 채권 회수를 위해 박 사장 부부 소유의 건물을 경매에 넘겼다. 서울동부지방법원 경매 6계에서 관련 절차를 진행했다. 1심에서는 박 사장이 이겼으나, 2심과 3심에서는 채권회사가 승소했다. 이 과정에서 채권회사는 현우기술연구소가 유령회사이며, 박 사장이 아내 건물을 임차해 사용해왔던 것은 탈세를 목적으로 했다는 내용의 진정을 법원에 제출했다. 경매 과정에서 이러한 진정이 유효한지를 따지는 것은 재판부의 판단에 중요한 문제지만, 동부지방법원 경매계에서는 임대차 관계 조사 등을 하지 않은 채 채권단의 입장만 반영했다. 박 사장이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이는 무시됐다.

3월16일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매각 허가 결정을 낸 후, 경매계에서는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매수인이 4월9일 대금을 내고 인도명령을 신청하자, 법원은 다음 날  결정과 동시에 결정문을 발송했다. 보통 법원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채무자의 의견 반영 절차를 거친 후에 이뤄지지만, 법원에서는 박 사장이 이의신청을 제기하기도 전에 결정을 내려버렸다. 경매계 측에서 보내는 각종 서류들이 박 사장에게 전달되지도 않았는데, 박 사장이 받은 것처럼 일이 진행됐다. 심지어 박 사장 건물에 들어와 있는 세입자를 법원으로 불러 ‘경매에 들어가면서 내지 않은 돈을 (채권회사 측에) 내겠다는 서약서를 쓰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도 했다. 법원 경매계가 채권자가 해야 할 일을 나서서 한 셈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경매 절차가 진행되면서, 박 사장은 이렇다 할 대응 한 번 못해보고 그나마 남은 재산마저 날릴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해 박 사장 측 법률 대리인은 “항고 및 보정 기간은 일반적으로 최소 일주일은 주는데 법원 경매계에서 법률로 명시한 최소 기간은 임의로 줄이고, 채권단 및 최고가 매수인의 결정신청에는 바로 다음 날 결정문을 송달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있다”며 “채무자든 채권자든 해당 경매 사건의 모든 이해당사자들은 공정하고 평등한 권리와 시간을 부여받아야 하는데도 이번 사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동부지방법원 경매 6계 팀장은 “판사들의 결정에 따른 법 집행이지 행정적 문제가 아니다”며 “밖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행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대통령까지 중소기업이 받는 불공정한 대우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일선에서는 국가 기관의 행정 편의주의로 인해 중소기업주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일은 법원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도 흔하다. 지난해에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 창조경제 기술이라며 청와대에 제출한 아이디어가 얼마 후 대기업에서 제품화되면서, 업체 측에서 청와대가 기술을 대기업에 넘겨줬다고 진정을 넣었던 일도 있었다. 청와대에서 자체 조사 결과 담당 행정관은 중소기업이 보낸 진정서를 서랍에 넣어둔 채 회신조차 하지 않아 중소기업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의 생각과 일선 행정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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