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는 역시 메르켈의 적수 못 된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5.1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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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있게 사죄하는 동안 죄 드러날까 감추기 급급

최근 우리 사회는 여러 차례 공개적 사과를 목격했다. 세월호 참사 1개월 후에 이뤄진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땅콩 회항’ 사건 피해자인 조창진 사무장에 대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손 편지 사과, 여성과 장애인 및 삼풍백화점 생존자를 비하한 ‘옹달샘’(개그맨 장동민·유세윤·유상무)의 기자회견 사과에 이르기까지 지난 1년간 우리가 지켜본 잘못의 종류와 사죄의 형태는 참으로 다양했다. 하지만 이 일련의 사과는 피해 당사자는 물론 사건을 지켜본 대중으로부터 오히려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적절한 시기와 합당한 형식, 분명한 책임의식이라는 3박자를 놓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는 사과의 실패를 통해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사죄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지 알게 됐다.

국제 관계에서 역사적 잘못에 대해 행해지는 공개 사죄는 그 무게가 훨씬 크다. 죄의 성질과 피해 규모, 책임의 범위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게감 때문인지 국제적인 과거사 사죄는 지난 199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노예 거래 역사를 사죄했고, 교황 바오로 2세는 중세에 횡행한 종교재판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이 뉴질랜드 마오리족에 가한 박해를 반성하면서 ‘사과 정치’의 막을 열었다.

3월9일(현지 시각) 일본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P연합
“나치 희생자 앞에 무릎 꿇기 위해 왔다”

국제 무대에서도 잘한 사과와 하나 마나 한 사과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이 단적인 예다. 일본은 위안부 동원 및 강제 징용과 민간인 학살 등 전쟁 중에 저지른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피해 국가들의 공분을 사고 있지만, 독일은 1970년대 이후 나치 범죄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죄를 하고 있으며 피해자 보상과 전범 색출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은 올해 두 나라 정상의 행보는 극히 대조적이다. 특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독일의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고 사죄해 주목받고 있다. 이 같은 ‘사죄 외교’ 행보의 배경은 무엇일까.

러시아의 승전 기념일 하루 뒤인 5월11일, 메르켈이 러시아를 찾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된 터라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무력을 과시하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전범국가 독일로서는 자칫 ‘패전국으로서 앙금이 남아 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부담스러운 결정이었다. 게다가 메르켈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의 크림 반도 점령이 “전후 질서를 어지럽힌 범죄 행위”라고 ‘돌직구’를 날렸고, 푸틴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졌다. 그럼에도 메르켈은 독일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조금도 의혹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독일이 일으킨) 전쟁의 수백만 희생자 앞에 무릎 꿇기 위해 왔다”고 말하며 무명용사 추모비를 찾아 헌화했다. 또한 “양국 간의 견해차가 큰 시기에도 과거사를 인정하고 우리가 전 세계에 얼마나 큰 고통을 퍼뜨렸는지 알고 있음을 러시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말해 나치 독일의 잘못을 분명히 인정했다.

독일의 사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독일 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전쟁 직후 4개국 점령과 뉘른베르크 재판을 경험하면서 독일인들 사이에 생겨난 왜곡된 피해의식과 냉전 시대의 논리가 작용한 탓이다. 보수 야당인 기독민주당과 기독사회당은 브란트를 “조국의 배신자”라고 몰아세웠고, 당시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서독 국민의 48%가 빌리 브란트의 행동을 “과하다고 본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브란트는 이듬해 냉전 체제의 긴장을 완화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그가 무릎을 꿇는 장면은 사죄와 화해 정치의 상징이 됐다.

“동아시아에서 더 문제 키우지 마라” 경고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메르켈의 최근 행보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단지 과거사를 반성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브란트의 사죄가 불러온 효과를 환기시키기 위해 거듭 사죄를 하고 있다. 즉, 메르켈에게 과거사 사죄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신냉전 시대’로 돌입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다시 돌려놓기 위한 주문(呪文)이다. 결국 메르켈은 브란트가 남긴 교훈, 즉 갈등을 해소하려면 화해를 해야 된다는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신냉전 시대에 메르켈의 말이 갖는 무게감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사죄를 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고 나아가 행동의 명분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경우를 대입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4월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아시아 지역의 평화 유지를 위해 일본이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한국·중국 등 이웃 국가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2차 대전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한다면서도 한·일 역사 갈등의 핵심인 위안부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아베 정부의 일본이 과연 지역적 연대를 강화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지난 3월 7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메르켈이 “독일이 프랑스 등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적국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 적극적으로 과거와 마주한 덕분”이라며 일본 사회에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다. 메르켈의 일본 과거사 발언은 ‘러시아와 중동 지역 문제로도 이미 충분히 골치가 아프니 동아시아에서 더 문제를 키우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로 읽을 수도 있다. 미국과 서유럽, 일본이 공조하고 러시아와 중국이 연합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역사 문제로 중국·한국과 갈등을 빚으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실리적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메르켈의 과거사 사죄가 갖는 국제 정치적 파급력의 원천은 사과 그 자체에 있다. 발언권을 획득하거나 실리를 얻으려는 계산이 전제되지 않았을 때 사과는 비로소 받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그런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 독일의 총리가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을까 고뇌하는 동안 일본의 총리는 죄의 실체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전 후 70년, 일본의 부끄러운 과거는 그렇게 현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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