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측근, 서산 성완종 빈소 왔었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5.2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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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모 전 부사장 회유 의혹 김 아무개씨…검찰, 홍 지사 기소 자신감

‘1번 ○○○ 30억, 2번 △△△ 20억, 3번 □□□ 20억, 4번 ○○○ 20억, 5번 △△△ 15억, … 11번 ○○○ 10억, 12번 △△△ 7억, 13번 □□□ 7억, … 17번 ○○○ 5억.’ 무슨 난수표처럼 보이지만, 이 기록은 20년 넘은 기자의 묵은 취재수첩에 적혀 있는, 과거 한 야당의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후보 헌금 액수다. 당선이 확실한 10번까지는 10억원 이상, 나머지 안정권은 7억원,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18~20번은 3억~5억원 수준이다.

“군수 후보 자리에 37억 요구하더라”

이보다 10여 년 전인 1980년대 초의 취재 노트에 적힌 10위권 내 헌금 액수는 3억~5억원이다. 확실 내지 안정권 기준으로 보면 3~5배 인상된 금액이다. 개인의 경력, 예컨대 전·현직 의원이냐 혹은 신인이냐에 따라 순번과 액수가 달라지긴 했지만, 일종의 ‘공정가’였으므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쓰여 있는 가격은 납부액 기준이라서 ‘후보자’가 쓴 전체 비용에는 1억 정도를 추가해야 할 수도 있다.

5월8일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1억원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고등검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집권 세력의 감시 눈초리가 번득이던 시절, 야당은 이런 식으로 자금을 조성했다. 물론 지역구 후보자에게도 돈을 거뒀다. 기득권을 가진 현역과 ‘영입 대상’은 예외였으나, 그 밖의 지망생 등은 당선 수월성 등을 기준으로 한 지역구 형편에 따라 일정액을 헌금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공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실력자나 ‘그 주변’은 줄을 대기 위해 밀려드는 지망생들로부터 ‘상당액’을 챙겼다. 이권 배분 등으로 수천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해 살림이 풍성한 여당에는 공천 헌금과 같은 ‘공식 제도’는 없었으나, 유력자와 지망생·기업 간의 ‘비공인’ 창구는 좀 더 활성화됐었다. 거기에 반대급부를 노린 기업들의 경쟁적 로비 등등 ‘개인 베이스 거래’는 왕성했다. 지금의 ‘성완종식 로비’는 예나 지금이나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오늘날에는 국가가 정당 살림살이를 위해 매년 수백억 원의 국고를 지원한다. 올해 1분기에만도 새누리·새정치연합·정의당 등 세 정당에 98억6000만원이 지급됐다. 선거 때는 별도의 막대한 비용이 지원된다. 대선이 있던 2012년 국고지원금은 1000억원을 훌쩍 넘었다. 정당뿐 아니라 개인 후보자(일정 득표 이상)에게도 실비를 보상하고 있다. 그러니 선거비용 대느라 부정을 저질렀다는 최소한의 변명조차 통할 여지는 없다. 정도를 걷는다는 전제에서다.

그러나 이렇게 제도적 지원을 했다지만 여야를 불문하고 ‘테이블 밑 거래’는 여전하다. 받는 측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이완구 전 총리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자 “거물이 겨우 3000이냐” 하는 소리도 나왔다고 하지만, ‘요즘 기준’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일 수도 있다. 2008년 총선 즈음에 출마를 꿈꾸던 J씨가 한 정당의 중량급 인사 L씨에게 2000만원을 건넸지만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후 J씨는 “예전 야당 거물들은 청탁이 불발되면 ‘원금’이라도 돌려줬다”면서 “그런데 나는 (L씨로부터 다른 자리) 기다리라는 말만 듣다가 세월 다 보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5월14일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비자금 리스트에 명단이 올라 총리직에서 사퇴한 이완구 전 총리가 검찰에 출두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국민 정서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 썩었다”

지난 3월 공개된 공직자 재산신고 내역을 보면, 국회의원 292명의 80%가 넘는 239명의 재산이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경제 불황 속에서 1억원 이상의 재산을 늘린 국회의원만도 2명 중 1명꼴(46%)이다. 그나마 본인이 ‘공개한’ 액수가 이만큼이니 돈 관련 비명은 엄살이라고 치부할 만하다. 힘에 부치느니 어쩌니 해도 쓸 만큼 쓰고도 남는 돈이 더 많은 곳이 ‘여의도’라는 사실을 국민들은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 베이스 거래에서는 야당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37억원을 달라더라. 30억은 ‘공식’이고, 7억은 수고한 관계자들을 위한 ‘비공식’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까지 할 게 아니다 싶어 때려치웠다.” ‘이 정당’의 후보가 되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인 지역의 군수를 노리다가 중도 포기한 K씨의 실토다. 국회의원 자리가 아니더라도 지방자치단체장·지방의원·조합장 등등 검은돈과 얽혀 굴러가는 게 정치판이다. 곳곳에 ‘다양한 꼬리표를 단 검은돈’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히려 더 음습해졌을 따름이다. 

‘성완종 리스트’가 알려지자 많은 국민이 경악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어불성설의 황당한 상황이 우연의 결과는 아닌 것이다. ‘경악-담담’이 결코 이율배반이 아닐 수 있는 게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다른 정치인들도 거의 다 받아먹었을 텐데 재수 없게 찍혔구먼’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듯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70% 가까운 장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가 부동산 투기 의혹 대상자라고 개탄하면서도, 불·탈법을 끝까지 규명하지 않고 흐지부지하는 우리네 ‘특이 정서’가 여기서도 작용하는 듯하다. 정상적이라면 여권이 뿌리째 날아갈 급변 사태임에도, 되레 여당이 직후의 4·29 재·보궐 선거에서 야당을 압도하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여야 지지 정당과 상관없는 절대 다수 국민의 이런 ‘모두 썩었다’는 인식은 어떤 형태로든 사태를 마무리해야 하는 사법 당국은 물론, 특히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을 더 옭아매고 있다. 사법 당국의 처지를 지레 걱정하는 것은 ‘봐주기 수사’로 적당히 매듭지으려 한다는 비난이 현재로서는 빤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의 첫 소환 대상이 된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몸부림은 국민의 상식 때문에라도 옴짝달싹 못하는 전형이다. 그의 모습은 ‘모래시계 검사’라는 명성과는 전혀 딴판이다. 뇌물 수사 전문가이자 뇌물이 횡행하는 정치판에서 관록을 쌓은, 법조 출신 거물답지 않다. ‘성완종 1억’이 ‘당 대표 경선 자금 1억2000만원’과 연결되자 ‘쓰고 남은 국회대책비(월 4000만~5000만원)를 집사람에게 생활비로 줬는데, 집사람이 이를 모은 게 3억원이 됐고, 은행 대여금고에 보관하다 그 일부를 자신의 경선 자금으로 주었고 남은 돈 1억5000만원은 언니 집에 옮겼다’는 등 법적·도덕적 시비를 넘어 치사하게 비칠 대목까지 스스로 털어놓고 있다. 경선 자금으로 준 1억2000만원은 5만원권이라는 등의 장황한 ‘디테일’에선 처연함마저 묻어난다.  1억원 수수 의혹을 벗어나기 위한 안간힘으로 보이는데, 설령 그렇더라도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자해(自害) 발언의 연속이다. 업무상 횡령, 공직자윤리법 등 현행법에 정면 위배되고 파렴치한으로 매도되기 십상인  범죄를, ‘대통령 후보 출마’까지 공식 선언한 인사가 TV 카메라 앞에서 밝히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사태 발생 초반, 그 자신이 우려하고 경계했던 올무에 걸려들고 있다. 자신의 발언이 스스로를 더 옭아매는 형국이다.

정계 이면에도 밝은 박찬종 변호사 등은 홍 지사의 그답지 않은, 이런 불가사의한 행동이 원체 다급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성완종 1억’은 틀리지 않는다는 식의 관측을 공공연히 개진하고 있다. 홍 지사로서는 냉정을 잃을 만한 상황인 것이다. 과거의 ‘공천 청탁 5억원 제의’ 등 해묵은 얘기까지 흘린 것은 친정(새누리당)과 청와대를 향한 엄포 이상의 절박감의 소산으로 보인다.

거짓이 거짓 낳으며, 사태 더 악화시켜

홍 지사가 최근 자진 신고한 자산은 29억9800여 만원이다. 그 형성 과정과 다과(多寡)를 논외로 하고, 또 ‘성완종 1억’의 진실 여부를 떠나 그간 홍 지사는 ‘상대적’으로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왔다. 실제 기자도 과거에 ‘돈 상자’를 들고 기웃거리는 파리 떼를 쫓는 왕년의 ‘홍준표 의원’을 몇 차례 발견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홍 지사가 오랜 기간 몸담았던 진흙탕 정치판의 풍토에서 완전히 자유로우냐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 여부만 언급하지 않을 따름이지, 기소를 장담하는 특별수사팀의 여유가 예사롭지 않다.

특별수사팀은 막판까지 1억원은 ‘2억 관례’에 미루어 구속하기엔 ‘미흡’하나, 증거 인멸·조작 혐의가 나오면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수사팀이 홍 지사의 사람으로 알려진 김 아무개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의 행적을 꼼꼼히 따지는 것도 그래서다. 김 전 비서관은 1억원 전달자로 알려진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 회유를 위한 접촉 전에도 서산의 성완종 전 회장 빈소에 모습을 비치는 등 수사팀으로서는 주목할 대목이 여럿이라는 전언이다.

홍 지사에 대한 1단계 수사를 마친 수사팀은 이완구 전 총리에게로 창끝을 돌렸다. 이 전 총리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확실하다. 일정 짜 맞추기 시도 등에 불법 증거들이 만만치 않아서다. 게다가 정부·여당의 지원 사격은 난망 그 자체다. 아예 초대형 스캔들을 봉합하기에 ‘적임’이라는 수군거림이 나돌 정도다. 현직 총리 당시 “받았다면 목숨 걸겠다”고 호언했음에도 그 말을 믿어주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이 전 총리 역시 ‘정치인 누구 하나 (금품 수수에서) 예외일 수 있겠느냐’는 ‘국민적 확신’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우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수도 정진에는 관심이 없는 한 ‘땡중’이 저잣거리에서 신도를 만났다. “어인 일이시냐”며 반기는 신도의 인사에 답하느라 허리를 굽히다가 장삼 밑에 숨겨둔 고기 덩이가 드러났다. 이어지는 신도와 땡중의 문답이다. “아니 웬 고기?” “안줏감이 필요해서….” “그렇다면 약주도 드시나요?” “그런 게 아니라 장모님이 오셔서….” “아니 살림을 차리셨던가요?” “그게 아니고 시앗 싸움 때문에….” “그럼 소실까지 두셨다는 말씀?” “….” 검찰 수사 도마에 오른 홍 지사와 이 전 총리의 안쓰러운 모습이 연상된다. ‘거짓이 거짓을 낳으며,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는 우화의 교훈이다. 일부라도 사실과 ‘부합’된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정면으로 책임지는 자세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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