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8. 시대 변화 못 읽고 왕권 강화 집착하다 몰락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5.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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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초 과감한 개혁 나선 대원군…퇴행적 모습 보이다 쫓겨나

조선 역사에서 국왕의 생부(生父)인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恩信君)의 후손인 흥선군 이하응은 세도정치하에서의 두 외척 가문의 대립을 자신의 기회로 삼았다. 익종(翼宗·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의 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친정인 ‘풍양 조씨’와 순조비 순원왕후 및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친정 ‘안동 김씨’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헌종 12년(1846년) 신정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조만영의 사망을 계기로 풍양 조씨의 세력은 ‘장김(壯金)’이라 불렸던 안동 김씨 세력에 밀리고 있었다. <매천야록>에서는 ‘그들(안동 김씨)이 오랫동안 국권을 장악해 세상에서는 안동 김씨만 알고 나라가 있는 줄을 몰랐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권력은 강한 권력 의지가 있는 사람이 잡기 마련인데 흥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지사(地師·풍수가)로부터 충청도 덕산 대덕사의 고탑(古塔)이 ‘큰 길지(吉地)’라는 말을 듣고 재산을 팔아 2만냥의 거액을 마련해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남연군 묘를 이장하려 했다. 그런데 탑신(塔神)이 나타나 ‘이곳에 묘를 쓰면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꿈을 형제들이 동시에 꾸었다. 이장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막내 흥선군은 “장김의 문전을 다니며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때 잘 사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이장을 단행했다. 그러면서 장김에게 불만을 가진 대비 조씨와 비밀리에 연결한 끝에 재위 14년의 철종이 사망한 당일인 1863년 12월8일 대왕대비 조씨로부터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으로 익종대왕의 대통(大統)을 잇게 하기로 작정했다”(<고종실록> 즉위년 12월8일)는 결단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왼쪽은 흥선대원군의 영정. 오른쪽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서양의 침략을 강력히 경고하고자 경남 창녕에 세운 척화비. ⓒ 연합뉴스
비변사 해체·서원 철폐로 노론 세력에 일격

대비 조씨와 흥선군 사이에 묵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으나 이미 대세는 결정 난 것이었다. 만 열한 살의 명복을 대신해서 대비 조씨의 수렴청정 절목(節目·법령)이 반포되었지만 조씨는 “사왕(嗣王·왕위를 이은 새 임금)이 나이가 어리고 국사가 다난(多難)하니 대원군이 대정(大政)을 협찬하고…(중략) 백관은 대원군의 지휘를 청(聽)하라”(현채 <동국사략>)면서 대원군에게 섭정의 지위를 넘겼다. 

이렇게 무관(無冠)의 제왕 대원군의 시대가 열렸다. 대원군의 명령인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는 조선 후기 그 어느 국왕의 명령보다 강한 권위와 힘을 가졌다. 대원군의 개혁 목표는 노론 벌열 가문의 약화와 왕실 강화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대원군이 어느 공회(公會)에서 재상들에게 “내가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시키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김병기(金炳冀)가 “대감의 지금 권세로 천리를 지척으로 만들 수도 있고, 남대문을 3층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태산은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발했다는 것이다. 천리 지척은 종친(宗親)을 높인다는 뜻이고, 남대문 3층은 남인을 기용하겠다는 뜻이고, 태산 평지는 노론(老論)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뜻인데, 이는 쉽지 않으리라는 노론의 반발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가장 먼저 왕권을 제약하던 비변사(備邊司)를 해체하는 것으로 노론의 반발을 비웃었다.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임시로 설치했던 비변사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후금(後金·청)과 항쟁한다는 명목으로 상설 관청화되었다.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풍양 조씨, 달성(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반남 박씨 등 6대 가문이 비변사 제조당상을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벼슬아치에 대한 인사권과 군사권은 물론 비빈(妃嬪)의 간택까지 관장하는 국정 최고 기관이 되었다. 비변사의 주청은 국왕이 거부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면서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고종 1년(1864년) 2월 비변사와 의정부를 나누는 분장절목(分掌節目)을 반포해 의정부를 비변사에서 독립시키고, 고종 2년(1865년) 3월에는 “서울과 지방의 사무를 모두 비변사에 위임한 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체로 보아 그럴 수 없다”(<고종실록> 2년 3월28일)는 대왕대비의 전교로 비변사를 의정부에 흡수시켰다. 비변사는 대신들의 대기실로 격하되고 비변사에 내렸던 ‘묘당(廟堂)’이란 현판은 의정부 대청으로 옮겨 달았고 비변사의 인장(印章)은 녹여서 영원히 없애버렸다. 전격적인 비변사 해체에 노론뿐만 아니라 전 조정이 경악한 것은 당연했다.

경복궁 중건·당백전 발행 ‘패착’

대원군은 노론이 숨 돌릴 틈도 없이 고종 2년(1865년)에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만동묘는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에 따라 송시열의 고향인 충청도 괴산군 화양리에 세운 명나라 신종(神宗)·의종(毅宗)의 사당이었다. 노론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을 명분으로 만동묘를 세웠지만, 실제 목적은 황제의 권위를 빙자해 제후(조선 임금)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동묘 철폐에 노론은 경악했다. 대원군은 노론 권력의 원천인 서원 개혁에도 나서 고종 8년(1871년) 47개 소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전국의 노론 계통 유생들이 ‘통유(通儒)’라는 격문을 돌리며 거세게 항의했으나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대원군은 고종 즉위 1년 전인 철종 13년(1862년) 영남과 호남, 충청을 휩쓴 농민들의 삼남민란이 삼정(三政)의 문란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농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田政), 병무 행정인 군정(軍政), 빈민 구제 행정인 환정(還政)이 삼정인데, 모두 부호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반면 가난한 백성들의 등골을 뺐다. 부호들은 지방관 및 아전들과 결탁해 막대한 농지를 세금 부과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은결(隱結·탈세전)로 만들었다. 대신 땅 한 평 없는 농민들에게는 ‘없는 땅에 징수’하는 백지징세(白地徵稅)를 남발했다. 대원군은 전국적인 농지 조사 사업을 전개해서 감춰진 은결에 세금을 부과했다. 환곡은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관곡(官穀)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기에 1할의 이자를 덧붙여 되돌려받던 빈민 구제책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이자만 7~8할에 이르는 악성 고리대로 변질되었다. 대원군은 고종 4년(1867년)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어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게 개혁했다. 가장 큰 문제는 양반사대부들은 군포(軍布) 납부의 의무에서 면제되고 가난한 백성들만 군포를 납부하는 군정(軍政)이었다.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아야 했으나, 역대 여러 국왕들은 양반들의 반발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다. 대원군은 고종 8년(1871) 모든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는 호포법(戶布法)을 강행했다. 대원군의 개혁 정치는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하기 위한 정면승부였다.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란 복고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청나라까지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은 중화(中華)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 세계질서가 수명을 다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고 왕권 강화와 성리학적 질서 회복이라는 봉건적 틀 속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이 그중 하나였다. 고종 2년(1865년) 4월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해 경복궁 중건 사업에 나섰는데, 공사 자금이 부족하자 ‘자진해서 납부한다’는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했다. 원납전은 곧 ‘원망하며 납부한다’는 원납전(怨納錢)으로 변질되었다. 고종 3년(1866년)에 유통시킨 당백전(當百錢)도 경제 질서를 크게 왜곡시켰다.

그러나 이런 내정의 실책보다 더 큰 문제는 대외 정책이었다.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행했던 천주교 박해를 더 심하게 자행한 것은 ‘노론 약화’를 내걸었던 대원군의 자기부정이었다. 이 때문에 발생한 국난이 고종 3년(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와 문수산성에 쳐들어왔던 병인양요였다. 조선의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결사대가 프랑스군을 가까스로 물리쳤지만 이는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미국의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군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군이 퇴각하기는 했지만 강화도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이었던 데 비해 조선군 전사자는 350여 명이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 형식은 조선의 승전이었지만 내용은 조선의 패전이었다.

1871년 6월 미군의 강화도 침략으로 벌어진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병사 350여 명이 전사했다. ⓒ 엔하위키미러
대원군의 실패, 개혁 방향의 중요성 일깨워

대원군이 이때 시대 흐름에 맞춰 자주적 개국을 단행했다면 조선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는 최초의 동아시아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해 8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대원군은 군사력으로 쇄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망상 속에서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은 데다 경복궁 중건, 환곡제 부활 등으로 상민들의 지지까지 상실하면서 권력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드디어 고종 10년(1873년) 10월 쇄국론자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비판 상소로 대원군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을 보여주듯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대원군의 실패는 개혁에서 그 방향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준다. 역사상 과거 퇴행적인 개혁이 성공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난 이명박 정부가 실패한 정권이 되었던 핵심 이유는 바로 과거를 지향한 데 있다. 그나마 대원군은 집권 초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강력한 개혁을 실천했지만 집권 5년 동안 과거만 쳐다봤던 정권이 성공할 수는 없었다. 불행히도 현 박근혜 정부 역시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현 사회에서 성공한 정권이 되기 위한 길은 ‘갑(甲)질’이 성행하는 한국의 사회 구조를 을(乙) 중심으로 바꾸는 내용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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