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외롭게 하지 말라”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5.2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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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우리가 어느 별에서> 펴낸 정호승 시인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이런 시를 써서 외로운 독자들을 달랬던 정호승 시인(65)이 최근 펴낸 산문집에서는 ‘죽음도 외로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전에 발표한 글이지만 최근 개봉해 늙은 부모님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 <약장수>와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영화 <약장수>에는 자식들과 떨어져 혼자 살다 쓸쓸히 죽어간 한 늙은 여인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 조용철 제공
“누군가의 손을 잡으려면 내 손이 빈손이어야”

“어버이날 며칠 전이었다. 성남 분당에 사시는 부모님과 하루 종일 통화가 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칠순이 넘은 두 노인네에게 무슨 불상사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하고 걱정부터 앞섰다.”

그날 정 시인의 부모님은 수의를 장만하러 동대문시장에 다녀왔다. 어머니는 비싼 수의를 반값에 샀다고 좋아하셨는데, 그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수의를 준비했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준비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 시인은 부모님의 모습에서 한국의 노인들이 외로움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셔윈 B. 누랜드가 쓴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라는 책에서 죽음을 감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자신을 일깨우는 한 구절을 발견한다.

‘각자 인생이 다르듯 죽음 또한 다 다르며, 각자에게 각기 알맞은 죽음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편안한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해야 할 권리가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 정 시인은 그 부분에서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되며, 죽음에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부분에 연필로 밑줄을 굵게 그었다. 부모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그에게 부모의 죽음을 외롭게 하지 않도록 미리 일깨워준 그 책에 감사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외롭게 하지 말라. 외로움 가운데 혼자 죽게 하지 말라. 의식이 불명한 상태에서도 영혼은 서로 교류된다. 죽어가고 있는 자에게 고독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정 시인의 새 산문집 <우리가 어느 별에서>는 19년 전 정호승 시인의 첫 산문집으로 태어나 몇 차례 개정·증보판을 거듭해온 ‘기구한 운명을 지닌’ 산문집이다. 1996년 <첫눈 오는 날 만나자>, 2001년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2003년 <위안>으로 발간됐다가 새로이 증보된 이 산문집은, 40년 가까이 되는 시인의 작품 활동의 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되새겨보게 한다.

“책에도 삶과 죽음이 존재한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의 운명은 내 운명과 같다. 오랜 세월 온갖 고통 가운데서도 죽음의 편에 있지 않고 끈질기게 삶의 편에 있어온 이 책을 통해 나는 오늘 내 인생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인간의 비극으로서의 외로움’을 이해한 정 시인이 자연을 바라보고 인생을 관조하고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이 산문집 전체를 관통하는 그림이다. 이 산문집은 그에게 오늘날까지 글을 쓰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의 가슴에 창을 달아주려’ 시를 쓰는 그는 ‘문학은 삶의 일부이고 최고의 시는 나 자신의 인생’이라는 깨달음을 고백한다.

“하느님이 주신 평생 귀한 선물은 어머니”

정 시인은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어머니의 시들이 적힌 종이뭉치를 발견한다. 가난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의 시이자, 절망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의 시였던 어머니의 글쓰기는 소년에게 시인으로서의 씨앗을 심어줬다. 아버지의 실패와 가난을 통해서도 소년은 많은 것을 배웠다. 가난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야말로 인생의 귀한 선물이었다. 그런 정 시인에게 시는 인간의 눈물을 이해하기 위한 무엇이었으며, 인간의 비극인 외로움을 진실하게 경험하고 이해하는 과정 속에 그의 시가 있어왔다.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 내 손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한 남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정 시인은 나이가 들어 철이 든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 땅의 어머니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어머니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며, 그 소중한 분을 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주신 평생의 귀한 선물이 바로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버리고 말았다”고 아쉬워한다.

정 시인은 그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는데, 누구나 한 번은 겪거나 겪을 일이라서인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머니가 확실히 늙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고맙다’라는 말씀을 곧잘 하신다. 변변치 못한 용돈 몇 만원을 드려도, 어쩌다 쇠고기 한 근을, 사과나 감 몇 개를 사 가지고 가도 그저 ‘고맙다, 고맙다’ 하신다. ‘부모 자식 간에 고마운 게 어딨어요’라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마디 하면 어머니는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때쯤이면 부모는 이제 몸도 마음도 다 늙으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쯤이면 자식들이 어머니의 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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