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안 되면 장렬히 전사하는 거지”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06.0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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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몰린 유승민, ‘신보수’ 기치 들고 정면 돌파 나설 듯

“유승민 원내대표도 (청와대와 친박이) 이 정도까지 노골적으로 공격해올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하다. 유 원내대표에게 의원 배지 한 번 더 다는 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간 주장해온 ‘신보수’ 구상을 구체화하면서 정면 돌파해보고 안 되면 장렬하게 전사하는 거지. 그래야 ‘정치인 유승민’의 미래가 조금이라도 열릴 수 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A의원이 지난 6월4일 몇몇 기자들과 만나 나눈 대화 골자다. 청와대와 친박 주류 측이 ‘법 위의 시행령’에 대해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국회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두고 사실상 ‘유승민 끌어내리기’에 나선 데 대한 유 원내대표의 대응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고개를 숙일 생각은 전혀 없다는 얘기다.

6월1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서청원 최고위원(맨 오른쪽)이 국회법 개정안 통과와 관련해 유승민 원내대표(맨 왼쪽)를 질타하고 있다. ⓒ 뉴시스
청와대ㆍ친박계와의 결별은 정해진 수순

지난 5월29일 새벽 국회법 개정안이 본회의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된 이후 불거진 여권 내부의 자중지란이 점입가경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내 친박계는 이번 개정 국회법이 정부의 행정입법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나 친박계 주류 측이 보인 반응은 다소 과하다는 게 중론이다. 삼권분립 위배나 위헌 여부 등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양분되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논리만 부각시킨 것인 데다 모법을 위배한 시행령 남발에 대한 비판은 그동안 국회 차원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제기돼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도 1998년 야당 의원 시절 이번 개정 국회법과 마찬가지로 시행령 등이 법률의 위임 범위를 넘어설 때 국회가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개정안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 명시돼 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개정 국회법보다 훨씬 더한 ‘슈퍼 국회법’이었던 셈이다.

사실 유 원내대표를 향한 청와대나 친박계의 다소 억지스러운 공세에는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친박계 핵심인 한 재선 의원은 유 원내대표에 대해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를 위해서라지만 4월 임시국회 때는 뜬금없이 국민연금 소득 대체율 50% 상향 조정에 합의해주더니, 이번엔 야당에 시행령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넘겼다”며 “계속 이런 식인데  대통령이 (유 원내대표와)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율사 출신의 한 비주류 중진 의원도 “개인적으로는 이번 개정 국회법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보진 않지만 이미 박 대통령은 마음을 굳힌 것 같다”고 말했다.

수도 서울의 방역망이 뚫리면서 ‘메르스 공포’가 극에 달하기 시작한 6월5일, 청와대 언론 브리핑의 일성이 유 원내대표를 향한 공세였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청와대는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하던 당시 유 원내대표에게 수용 불가 입장을 전달했다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전날 유 원내대표가 “사실과 다르다”고 한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같은 시각 모든 언론은 메르스 확산에 대한 우려를 전하고 있었다.

개정 국회법을 둘러싼 논란을 대하는 유승민 원내대표 측의 분위기는 당혹스러움에서 점차 비장함으로 바뀌었다. 박 대통령의 최대 개혁 과제 중 하나였던 공무원연금법을 어렵사리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회선진화법이란 현실적 제약 조건 때문에 결국 여야 간에 주고받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청와대와 친박계가 과하게 몰아붙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유 원내대표 측도 청와대·친박계와의 결별을 정해진 수순으로 보고 있지만, 이후 행보에 대해선 고민이 크다.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상당하다지만 여전히 TK(대구·경북)를 중심으로 한 40% 안팎의 공고한 지지세가 박 대통령을 받쳐주고 있고, 아직 임기도 절반 이상 남아 있다. 시간이 갈수록 ‘현실 권력’의 힘이 약화한다지만, 아직 유 원내대표는 당내 지지 기반이나 국민적 인지도 등에서 ‘미래 권력’의 한 축으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정면 대결을 해서는 승산이 없고, 박 대통령이 이번에 보여준 태도를 감안하면 납작 엎드린다고 해도 유 원내대표에게 미래가 열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6월2일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들이 ‘국가경쟁력 강화 포럼’ 세미나를 열고 ‘국회법 개정안 위헌 논란’을 주제로 제정부 법제처장의 강의를 듣고 있다. 6월2일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들이 ‘국가경쟁력 강화 포럼’ 세미나를 열고 ‘국회법 개정안 위헌 논란’을 주제로 제정부 법제처장의 강의를 듣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새로운 보수 정치의 미래 위해 도전할 것”

이 때문에 유 원내대표가 사퇴 카드로 배수진을 쳤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박 대통령이 개정 국회법 수용 불가 방침을 공개 천명했던 지난 6월1일, 유 원내대표는 측근들과 장시간 회의를 했는데, 결론은 ‘장렬한 전사’였다고 한다. 한 회의 참석자는 “박 대통령과 친박계의 노골적인 끌어내리기에 굴복할 경우 유 원내대표의 정치인생은 끝나는 것이라는 게 일치된 의견이었다”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가 오가진 않았지만 내 입장에선 유 원내대표의 신보수 구상을 조금이라도 구체화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끌리더라”고 말했다.

당초 유 원내대표는 6월 말까지 정책위원회에 각 분야 외부 전문가들을 결합시켜 내년 총선 공약의 기본 틀을 다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여기에는 자신이 4월 임시국회 때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밝힌 ‘신보수’ 구상을 녹여낼 생각이었다. 특히 ‘중(中)부담·중(中)복지’ 정책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세제 개편을 추진키로 하고, 당내 소장 개혁파들이 주축이 된 경실모 차원에서 구체적인 세제 개편 방안을 모색해왔다. 선(先) 법인세 인상을 통해 국민적 동의 기반을 넓힌 후 소득세는 물론, 필요하다면 차등 세율 방식으로 부가가치세까지도 검토하겠다는 큰 밑그림은 그려진 상태다. 박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 기조를 정면 비판하며 차별화한다는 의미다.

유 원내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솔직히 청와대나 친박계의 목표는 유 원내대표부터 끌어내린 다음 김무성 대표도 쥐고 흔들어서 내년 총선 공천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승산 없는 게임인 건 알지만 적어도 새로운 보수 정치의 미래를 위해 도전하다가 날개가 꺾인다면 그나마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오면 곧바로 재의결 절차를 밟겠다는 생각도 굳혔다고 한다. 이 과정 역시 원내대표직을 걸고 신보수의 기치를 내거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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