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돌보며 살 터이니 잘 부탁하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6.0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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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70주년 잔칫상 받은 김옥현(94)·성낙희(89) 부부

결혼은 말 그대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당연히 인종·나라를 가리지 않는 만인의 관심사다. 각자가 책을 몇 권씩 써도 될 만큼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더구나 결혼에 관한 한 혁명적 전환기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 국가 중 이혼율 1위라는 달갑지 않은 통계만으로도 여기에 얽힌 사연들이 어떨지는 짐작이 간다. 2010년 한 해 동안 32만6000쌍이 결혼하고 11만7000쌍이 이혼했다는 공식 집계가 발표된 이래 △황혼 이혼이 이혼의 대종(2012년 기준 28%)을 이루고 △40대 성인 820만명 중 64만 명이 독신 상태이며 △한 부모 가정이 167만 세대(2012년)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등등 관련 통계를 대하면 현기증이 난다. 이러니 부모가 이혼하면 ‘문제가 있다’는 인식하에 붙여졌던 ‘결손가정’ 운운했다간 치도곤 당하기 십상인 시대다.

“제 결혼식에 오실래요?”

“뭐라고?”

“오신다면 초청장 보내드릴게요.”

결혼 70주년을 맞은 김옥현·성낙희 부부가 5월28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워커힐 애스톤 하우스에서 포즈를 취했다. 94세-89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쳐 보인다. ⓒ 시사저널 김현일
P씨(68)는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서른두 살 외동딸이 다음 달 결혼할 예정이라며 (아버지 P씨가) 참석할 의향이 있다면 초청장을 보내주겠다니. 40년 전 미국에 이민 와 뉴욕에 정착한 P씨는 고생 끝에 자리를 잡았고 교포 여성을 만나 이 딸을 얻었다. 온갖 상념이 P씨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위를 졸지에 맞는 자리에 ‘초대’ 받았으니 무슨 생각인들 안 들 것인가. 친구 L이 자기 아들로부터 (아들의 결혼식) 초청장 20장을 간신히 ‘배정’받았다고 했을 때 가가대소했던 기억도 떠올라 그 와중에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국 교민사회의 요즘 쑥덕공론을 빌려오긴 했지만 그 엇비슷한 황당 스토리는 한국 사회에도 널려 있다. ‘어렵게·늦게 결혼, 쉽게·언제고 이혼’으로 압축되는 풍속도가 말해주듯 불과 30년 사이에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남녀가 함께 ‘잠’자면 싫든 좋든 으레 결혼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괴담이다. 서른 살이 넘으면 ‘노(老)’자가 붙고 온 집안이 나서 시집·장가보낸다며 법석을 피웠는데 20대 혼인이 희귀 케이스가 된 지 오래다. 예전엔 시집간 딸이 못 살겠다고 친정에 돌아오면 ‘죽어도 시집 귀신이 돼야 한다’며 쫓아보냈지만 지금은 사위가 시원찮으면 딸이 참고 살겠다 해도 친정 부모가 끌어다 이혼을 시키는 세상이다. 한두 자녀의 집안에서 귀여움을 받고 자라나다 보니 인내와 배려가 부족한 게 이혼율을 높이는 요인이라는데 부모들이 되레 ‘거들고 나서는’ 판이니 오죽할까 싶다. 이렇듯 100세 시대 도래를 앞두고 의료·복지 부문과 함께 많은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게 결혼 문제다.

신부 얼굴도 모르고 결혼한 스물한 살 청년

지난 5월 말, 이런 혼돈(caos) 시대에 특기할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한 부부의 결혼 70주년 기념 잔치가 워커힐 애스톤 하우스에서 열렸다. 주인공은 일봉(逸峰) 김옥현 회장(94)과 희원(希園) 성낙희 여사(89). 두 사람은 1945년 3월24일 혼례를 올렸다. 대한민국 슈퍼마켓 제1호로 기록된 삼우당 설립자로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는 김 회장이지만 결혼 당시는 한국인 대다수가 그랬듯이 몸뚱이가 재산의 전부였다.

“만주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21세 때다. 아버님 쉰넷에 나를 나으신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혈육이라곤 누님과 나뿐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주에서 충북 음성까지 천리 길을 달려가 간신히 장례 당일 도착했다. 삼우제를 지내자 집안 어른들이 고향에 온 김에 장가를 들라고 했다. 아버님 생전에 혼약이 있었으니 상(喪)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그 길로 좀 떨어진 마을에 사는 한학자 성준용 선생 댁으로 따라가 ‘처가’ 어른들께 인사를 올렸다. 걸친 낡은 옷이 전부인 나에게 장인·장모님이 주문한 것은 소매에 붙인 상장(喪章)을 떼고 오라는 당부였다. 처가 건넛방에 차려진 신방에서의 첫날밤, ‘신부님 여러 가지 미안한 마음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아버지께 효도하는 심정으로 잘 돌보며 살 터이니 잘 부탁하오’라고 했다. 신부는 다소곳이 듣기만 했다. 여자와 한자리에 있는 게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려 어쩔 줄 모르다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옆에 신부가 앉아 있었다.”

2차대전까지 더한 일제 식민 말기와 해방 정국, 그리고 6·25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 거의가 고난과 궁핍, 기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성 부부도 다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입에 풀칠을 하던 부부는 휴전협정 직후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하루 수십 리 길을 뛰어다니며 과자·담배 팔이 등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는 부부가 그나마 안정을 찾은 것은 중앙청 옆(종로구 내수동)에 구한 좌판과 구멍가게가 자리를 잡으면서다. 부지런함과 성실로 돈을 모았고, 셋집을 사들여 건물을 지었다. 1970년 통인시장 입구에 개업한 삼우당은 오늘날 한국 슈퍼마켓의 효시다. 유통 혁신을 이뤘다며 언론의 단골 취재 대상이 됐고 서울시 시범점포 제1호로 지정됐다. 이후 동부상사를 설립한 김 회장 부부는 사업체를 장남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각기 그림과 서예에 열중하고 있다. 삯바느질 등에서 벗어난 성 여사의 서예 실력은 국전에 입상할 정도다. 자기네 젊은 시절 고생을 거울삼아 어려운 처지의 학생과 이웃을 돕는 부부지만 ‘낯간지럽다’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드러나는 것이 싫어 세금 처리조차 마다한다는 전언이다. 하룻밤에 1800만원 하는 한국 최고급 호텔에서의 금강혼 예식은 “검약도 좋으나 부모님의 70주년 결혼 행사만은 양보할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는 3남 1녀와 열두 명 손자·손녀의 고집으로 성사됐다.

테이블을 돌며 하객에게 인사하는 김옥현·성낙희 부부. 서로에 대한 신뢰와 감사가 ‘잉꼬’와 장수 비결이라고 했다. ⓒ 시사저널 김현일
“마음 비우고 여유 갖는 게 건강과 화합 비결”

김 회장의 유화, 성 여사의 서예 작품 전시장 앞 잔디밭에 마련된 연회장은 두 부부와 네 자녀의 200여 친지들만으로 채워졌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부부는 각기 상대를 향해 “고맙다, 사랑한다”고 했다. 아직도 원기 왕성한 성낙희 여사는 테이블 사이를 ‘뛰어’ 다녔다. 청력만 떨어졌을 뿐 여전히 정정한 김 회장은 자녀와 하객들의 노래에 맞춰 손뼉치고 노래했다. 사회를 보던 개그맨 A씨가 “이 자리에 서는 자체가 영광이라 무보수 출연을 했다”고 너스레를 떨자 또 박수가 터져 나오는 등 애스톤 하우스 언덕엔 화기가 넘쳤다.

100세 시대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운운은 고리타분하기까지 하다. 90세 나이는 보통이니 김·성 부부의 나이는 별게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부부 모두가 건강하게 결혼 70주년을 맞는다는 것은 축복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결혼 25주년은 은혼식, 50주년은 금혼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60주년을 동양에선 회혼례(回婚禮), 유럽에선 금강혼식(金剛婚式)이라고 부른다. 다이아몬드 선물을 주고받기에 금강혼이라고 하는데 그만한 가치는 충분할 듯하다. 미국에선 25년 주기의 3배수가 되는 부부가 생기면서 75주년을 금강혼으로 명명했는데 어찌 보면 60주년 이상은 결혼에 관한 한 ‘무한대(∝)’이기에 따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87년 최신원(당시 89세)-여삼주(93) 부부가 75주년 기록을 세운 바 있으며, 이후엔 70주년 부부 소식조차 끊어졌다.

70주년 행사를 마친 김옥현·성낙희 부부는 작품 만들기와 여행·봉사 스케줄을 다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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