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30. 허영인 회장 장인은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6.0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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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애경가와 사돈…파리크라상 발판으로 ‘제빵 왕국’ 건설

파리크라상(파리바게뜨)·삼립식품·샤니·BR코리아 등으로 구성된 SPC그룹에서 상장사는 삼립식품이 유일하다. 2012년 1월 1만1900원에 불과했던 삼립식품 주가는 6월2일 기준 27만6500원을 기록했다. 불과 3년여 만에 무려 20배 이상 급등한 것이다.

SPC그룹 창업자는 1921년 2월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 온천리에서 태어난 초당(草堂) 허창성 전 명예회장이다. SPC그룹의 모태는 허창성이 1945년 황해도 옹진에 세운 ‘상미당(賞美堂)’이라는 빵집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보통학교 졸업 후 진학을 포기한 허창성은 제과점에 취직해 제빵 기술을 배워 25세에 상미당을 창업했다. 당시 옹진에는 미군이 주둔해 있어 설탕·버터 같은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어 빵을 만들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3년 후인 1948년 허창성은 더 큰 시장을 노리고 아무 연고가 없던 서울 을지로4가(현 방산시장 부근)로 상미당을 옮겼다. 

2010년 12월22일 허영인 SPC그룹 회장(오른쪽)은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한·프랑스 경제 협력에 대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 뉴시스
“제빵 사업은 문화 사업인 만큼 품질이 중요”

상미당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빵집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빵에 대한 허창성의 열정이 남달랐다는 점과 시대 흐름을 읽고 끝없는 변신을 거듭하는 감각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허창성은 1949년 기존보다 연료비를 10분의 1 수준으로 낮춘 무연탄 가마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연료비를 아껴 이익이 남자 그것을 기술 개발에 투자했다. 1959년에는 서울 용산에 삼립제과공사(현 삼립식품)를 세워 연구·개발을 본격화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4년에 내놓은 것이 삼립빵, 즉 크림빵이다. 같은 빵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이른바 ‘공장 빵’ 시대를 연 것이다. 업계 최초로 비닐 포장으로 출시된 크림빵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국민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공장 빵’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새로운 제품 개발을 결심하고 떠난 일본 방문길에서 허창성이 본 것은 찐빵의 인기였다. ‘이것이다!’ 생각한 그는 귀국 뒤 ‘찐빵의 특성을 살리되 제빵회사 제품답게 더 수준 있는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문을 내걸고 연구·개발을 지시한다.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인적이 드문 산속에 연구실을 짓고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1년 만에 나온 것이 1971년 10월 첫선을 보인 삼립호빵이다. 당시 겨울은 제빵업계에서 빵이 팔리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호빵이 나오면서 겨울에도 빵이 많이 팔리게 됐다. 제빵업계로서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것이다. 1960년대가 크림빵의 시대였다면 1970년대는 ‘호호 불면서 먹는다’는 호빵 시대였다. 호빵이 하루 160만개씩 팔려나가며 삼립식품은 재계 순위 30위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호빵의 크기는 직경 10cm, 무게 108g이었는데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빵 사업은 문화 사업인 만큼 절대 품질에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허창성의 의지가 그대로 배어 있다. 크기와 무게는 같지만 호빵의 내용은 시대 변화에 따라 단팥호빵, 야채호빵, 피자호빵 등으로 진화하며 오늘날에도 사랑을 받고 있다. 소비자들의 기호와 시대 흐름에 맞춰 혁신을 거듭해온 허창성은 1980년대에는 케이크형 보름달빵을 내놓았다. 아침 식사 대용으로 식빵 대량 생산에 나섰고, 라면·우동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살아서도 빵을 만들고 죽어서도 빵을 만들겠다”던 허창성은 1992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형과 달리 ‘빵’에만 집중한 허영인   

허창성은 김순일과 결혼해 6남 1녀를 뒀는데 1983년 장남 허영선을 후계자로 택했다. 경기고를 나와 미국 보스턴 대학에 유학 중이던 허영선은 귀국해 삼립식품의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았다. 20세 때인 1969년 삼립식품에 입사한 후 현장에서 경영을 배워온 차남 허영인은 당시 삼립식품 사장이었으나 후계에서 밀려 삼립식품 매출의 1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회사였던 샤니의 대표이사가 됐다. 허창성이 장남 허영선을 후계자로 택한 것은 ‘장남 우선’이라는 개성 상인의 오랜 전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사업과 관련해 허영선과 허영인은 다른 길을 걸었다. 허영선은 업종을 다각화하는 길을 택했다. ‘빵 사업’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음료·유선방송 사업 등에 진출했다. 3남 허영덕 삼립식품 사장과 함께 삼립개발·성일통상·삼립유지 등을 경영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뛰어든 강원도와 인도네시아 발리 등의 리조트 개발 사업에서 외환위기가 터지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돌아온 3억원의 어음을 갚지 못해 부도가 났다.

반면 허영인은 경희대 재학 시절 빵을 잘 만드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맛을 보고 싶어 운전면허를 땄고, 1981년에는 미국제빵학교(AIB)에 유학을 갔을 정도로 빵 전문가였다. 1919년 개교한 이 학교는 빵 제조 및 유통 분야 전문가들이 필수 코스로 여기는 곳이다. 허영인은 “경영자는 경영 마인드뿐만 아니라 엔지니어처럼 기술 마인드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학을 떠났다. 대학생 때부터 제빵 현장에서 살았던 그는 본업인 ‘빵’에 집중해 진작부터 역량을 인정받았다. 1985년에는 시대 흐름에 맞춰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배스킨라빈스를 도입했고, 86년에는 서울 강남구 반포동에 파리크라상을 열었다. 88년에는 파리바게뜨를 광화문에 개점했다. 파리바게뜨라는 이름 자체도 파격적이었지만 프랑스풍 정통 고급 빵을 즉석에서 구워내 고객에게 제공하는 형식도 신선했다.

허영인은 2005년 10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파리바게뜨와 같은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배스킨라빈스 같은 아이스크림 사업은 모두 후발 주자로 시작한 것이다. 그저 남들처럼 해서는 이길 수 없고, 대신 남들이 못했던 소비자의 잠재된 욕구를 끄집어낼 수 있는 ‘차별화’에 몰입했다. 차별화할 때는 그저 한두 가지 해서는 안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해야 한다. 당시 제과점은 ‘당’자 돌림 일색이었는데 이름부터 ‘파리크라상’으로 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종의 ‘블루오션’을 개척했던 게 아닌가 싶다”라고 회고했다.

형인 허영선이 이끌던 삼립식품이 외환위기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를 맞았을 때 동생 허영인은 파리바게뜨·배스킨라빈스 등을 급성장시키며 매출 5000억원대에 달하는 태인샤니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허영인은 이를 바탕으로 2002년 삼립식품을 인수했다. 형인 허영선으로서도 자신이 이끌다 부도난 회사를 동생이 인수해 창업자인 아버지의 뜻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한국경영사학회에서는 허영인이 가업을 잇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효 경영’이라는 논문을 싣기도 했다. 허창성은 허영인이 삼립식품을 인수하자 “고맙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빵을 좋아했으니 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허창성 전 명예회장 ⓒ 시사저널 포토
세계에서 가장 큰 제빵 프랜차이즈 일궈

창업자 허창성은 2003년 8월 별세했는데 죽기 전 병상에서 허영인을 불러 “다시 한 번 옛날 그대로의 크림빵을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당부를 접한 허영인은 연구실에서 수십 개의 시제품을 만들었다. 직접 맛을 보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해 옛날 그대로의 맛이라고 생각되는 크림빵이 만들어진 뒤에야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만든 빵을 먹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차남 허영인이 허창성에게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허창성은 허영인에게 “회사는 수백만 개의 빵을 만들지만 고객은 단 한 개의 빵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빵의 품질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허영인은 2004년 삼립식품(Samlip)과 샤니(Shany)의 ‘S’, 파리크라상(Paris-Croissant)의 ‘P’, 앞으로 함께할 새로운 가족(Company)을 의미하는 ‘C’를 합쳐 SPC그룹을 출범시켰다.

허영인이 사업을 크게 확장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파리크라상의 성공이다. 1988년 광화문점을 시작으로 파리바게뜨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업계 1위는 ‘크라운베이커리’였다. 파리바게뜨는 아예 매장에서 빵을 직접 굽는 베이크 오프 방식을 도입했다. 소비자에게 매장에서 바로 구워낸 빵을 판매한다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사업을 시작한 지 9년 만인 1997년 허영인은 고려당·신라명과·크라운베이커리 등을 제치고 파리바게뜨를 독보적인 1위로 올려놓았다. 파리바게뜨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제과·제빵 프랜차이즈업체다. 중국은 물론 미국 뉴욕, 싱가포르, 베트남 등에도 매장이 있다. 2014년에는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에도 진출했다.

허창성-김순일 부부의 6남 1녀 가운데 허영인을 제외하고 현재 SPC그룹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는 5남 허영석 SPC그룹 고문이 유일하다. 6남 허영한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다. 허영인 회장은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의 막내딸이자 이동찬 전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의 여동생인 이미향과 결혼했다. 이미향은 홍익대 미대를 졸업했다. 이동찬의 차남 이동보 전 코오롱TNS 회장은 1974년 당시 ‘2인자’로 불렸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녀 김예리씨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허영인-이미향 부부는 두 아들을 뒀다. 장남 허진수 파리크라상 전무는 지난 3월 삼립식품 등기이사에 선임되며 경영 일선에 나섰다. 아버지가 나온 미국제빵학교(AIB)를 수료한 허진수는 2005년 그룹에 입사했다. 연구·개발(R&D)과 글로벌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허진수는 2008년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여섯째 아들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의 장녀 박효원과 결혼해 아들 둘을 뒀다. 허영인의 차남 허희수 BR코리아 전무는 2007년 그룹에 입사해 미래사업부문장(상무)을 거쳐 전무로 있다. 허희수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손녀 안리나와 혼인했다. 장 회장의 차녀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과 채 부사장의 남편 안용찬 애경그룹 부회장(제주항공 대표이사)이 허희수의 장모·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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