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과 순수의 정수가 마음에 와 닿다
  • 정준모│미술비평가(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감독) ()
  • 승인 2015.06.0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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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조각가 탄생 100주년 기념전

한국의 참담한 근대사에서도 문학과 미술, 연극 분야에서 민족문화의 불길을 지켜온 많은 문화예술인이 있다. 올해는 유난히 많은 문인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시인 박목월과 서정주, 소설가 황순원·임옥인·임순득, 극작가 함세덕, 아동문학가 강소천, 평론의 곽종원 등이 그들이다. 미술계에서는 우성 김종영과 남농 허건이 태어난 지 1세기가 지났다. 재작년에는 이쾌대가, 지난해에는 박수근이 그리고 올해 우성과 남농, 자수예술가 박을복이, 내년에는 이중섭과 전혁림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이들의 탄생 100주년을 귀하게 기려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00년 전이면 1915년이다.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지 5년이 되던 참담하고 각박하던 시절이다. 이들은 일제의 압제와 교육, 한글 사용 금지 등 문화 말살 정책에도 오늘날 우리들이 자랑하는 문학적·예술적 업적을 남겼다. 나이 서른에 광복을 맞았지만 이내 6·25 전쟁과 분단 등으로 궁핍의 시대를 살게 된다. 불모의 땅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들을 우러러 모시고 기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말의 조바심이 존재한다. 풍요롭고 자유스럽다는 지금, 그들의 문학적·미술적 성과에 필적할 만한 작품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 탓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문화적 자산을 한국 현대사에 기록해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자조도 나온다.      

ⓒ 정준모
8월 말까지 김종영미술관·서울대미술관 전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조소인 김종영을 되새기는 전시는 6월7일부터 서울 평창동의 김종영미술관(8월28일까지)과 서울대학교미술관(7월26일까지)에서 열린다. ‘나는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만 정직하고 순수하게 삶을 기록할 따름이다. 그것이 희망이고 기쁨이기를 바란다’는 말에서 어떤 이들은 민중미술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소요하듯 한 바퀴 돌아보면 그의 말처럼 사물과 조소를 대하는 ‘정직’과 ‘순수’의 정수와 그 의미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한다. 마치 유럽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성당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러면서 쉽게 전시장을 돌아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진지해지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불각의 조소 작품이 주는 예술의 힘이다. 그 힘은 작품 한 점, 한 점에서도 여전하지만 하나의 공간에서 각각 뿜어내는 힘들이 한곳에 모여 기를 발산하기도 한다.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스승인 장발의 권유로 조소에 입문했고, 도쿄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했다. 작품은 일관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걸어온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6·25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철이나 브론즈, 나무, 돌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추상 조각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의 조형적 관심은 오직 하나다. 만들되 만들지 않은, 깎되 깎지 않은 ‘불각의 조각’이었다. 돌을 깎고 쪼아 형태를 만들었지만 흐르는 시냇물에 오랫동안 담가 인위적인 정 자국이나 손자국이 마모되면서 돌 본연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다시 찾게 했다는 의미다. 애써 만든 형태를 자연에 되돌려놓고 그것이 본질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양의 무위 철학이나 윤회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그의 조소 작품은 조선시대의 선비정신과 맞닿아 있다. 그 실천이 바로 작품으로 드러난다.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이 멋있게 치장한 장식적인 작품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눈에 익숙한 형태와 색을 갖춘 그림이나 조각에 익숙한 초보 미술 애호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근대기 조선시대의 청빈과 검소 그리고 스스로를 수양하는 자세를 올곧은 삶이라 믿고 실천했던 마지막 선비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인문의 정신이 실천으로 드러난다. 오늘날 무성한 인문학 열기가 조금은 사이비(?) 같다는 의구심을 가졌던 이들이라면 김종영의 작품을 통해 인문학과 인문 정신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수양하고 마음을 닦는 수단으로 조소를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오랜 시간 하나의 작품에 매달려 쪼고 깎기보다는 닦고 문지르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작품은 품이 많이 드는 작업임에도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서양의 모더니즘과 맥이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생각과 작업의 성과물이 형태적으로는 모더니즘 영역에 닿아 있지만 실은 그 반대다. 서양 현대미술에서 등장하는 모더니즘은 비워내기보다는 모더니티를 채워나가고, 모았던 것을 덜어내는 방식이다. 김종영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비워내는,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챙기는 자기수양의 결과물인 동시에 수양의 도구다. 따라서 그를 모더니스트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자생적 모더니즘이자 모더니스트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일본식의 ‘화혼상재’나 중국식 ‘중체서용’이 아닌 조선조 600년을 이어오며 스스로 도달한 우리의 삶의 방식이자 자연을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 정준모
작품에서 인문학과 인문정신의 힘 느껴져

형태상으로는 헛헛한 작품이 꽉 찬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작품을 제작하면서 꾸미지 않고 덜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단순함은 적막으로, 고요로 눈에 들어오기 전에 마음에 전해진다. 그 까닭은 그가 살고 있는 집, 즉 미술관의 공간과 관련이 있다. 그의 미술관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북한산 작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낮추었던 그를 닮았다. 비가 좀 내리고 북한산 물들이 골짜기로 달려들 즈음 미술관을 찾으면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그윽한 차향 같은 미술관 분위기와 어울려 마치 죽비 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삶과 생각과 닮은 집에 살게 된 것은 그를 기억하는 가족들 덕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고 했던가. 단순하지만 그윽하고, 검박하면서도 기품 있고, 낮은 곳에 있지만 위엄이 있는 이 미술관은 정말 그를 닮았다. 거개의 사립미술관이 경제적인 이유나 소장 작품의 부족, 전문 인력의 부재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이를 이유로 개점휴업 상태인 경우가 많다.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김종영미술관은 되레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손 벌리지 않으려고 등록도 하지 않고 있다. 사립미술관에 주어지는 몇 가지 혜택도 받지 않고 스스로 참신하고 밀도 있는 활동을 함으로써 귀감이 되고 있다. 지방의 공립미술관들이 제발 좀 그 잘하는 벤치마킹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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