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불꽃… 이젠 450호 홈런이다
  • 김경윤│스포츠서울 기자 ()
  • 승인 2015.06.0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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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 한국 야구사 새로 쓴 이승엽

지난 6월3일 포항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삼성의 경기. 3회말 2사에서 타석에 들어선 삼성 이승엽(39)이 상대 투수 구승민의 140㎞ 직구를 통타했다. 공은 오른쪽 담장을 넘어 야구장 밖으로 날아갔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400호 홈런의 주인공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승엽은 언제나 그랬듯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리고 “그동안 좋은 지도자들을 많이 만났다. 처음부터 실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꾸지람도 많이 들었고, 연습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400개 홈런을 치는 날이 왔다”고 말했다.

소박한 소감이다. 사실 이승엽은 소박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선수다. 화려한 기록을 대량 생산하며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한 시즌 아시아 최다 홈런(2003년 56홈런), 한국 야구 최초의 은퇴 전 영구결번 선수, 단일 시즌 최다 타점·최다 루타 등 숱한 기록을 남겼다. 프로야구의 지평을 넘어 한국 스포츠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이승엽, 그의 첫걸음은 우연처럼 시작됐다.

ⓒ 연합뉴스
홈런왕 타이틀 다섯 번 차지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승엽은 투수 출신이다. 경상중학교 재학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1993년 경북고교의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다. 고교 2학년이었던 이승엽은 팀 에이스로 활약하며 최우수투수상까지 차지했다. 당시 엘리트 선수들은 대학교를 거쳐 프로에 입단하는 게 코스였다. 이승엽도 그랬다. 그는 한양대 입학이 가계약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입 수학능력시험에서 300점 만점에 37.5점을 맞아 대학 진학 자격을 잃었다. 이승엽은 훗날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들이 술을 엄청나게 권하는 모습을 보고 대학에 가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고의로 시험을 망쳤다”고 말했다.

좌완투수로 삼성에 입단한 이승엽의 시작은 엉뚱하게 진행됐다.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으로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구단에선 스프링캠프 때 타자로의 전향을 권했고, 이승엽은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때의 선택이 한국 야구사를 바꾸는 ‘한 수’가 됐다. 이승엽은 1995년 데뷔 첫 시즌에 타율 0.285, 홈런 13개로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장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97년 32개, 1998년 38개의 홈런을 쳤고, 1999년 54개를 폭발시켰다. 2000년(36개)과 2001년(39개) 잠시 주춤(?)했던 이승엽은 2002년 47개의 홈런을 쳤고 2003년 56개를 쳐 아시아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그는 1997년부터 일본 이적 직전인 2003년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홈런 30개 이상을 쳐냈고, 홈런왕 타이틀을 5번이나 거머쥐었다.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 타자가 된 것이다.

이승엽은 2003년 시즌을 마치고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었다. 이승엽은 공개적으로 메이저리그(ML) 진출 희망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미국 진출은 녹록하지 않았다. LA 다저스, 뉴욕 메츠, 시애틀 매리너스 등 다수의 구단이 언론에 오르내렸고 협상을 진행했지만 진전되지 않았다. 결국 이승엽은 방향을 선회해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에 입단했다.

첫해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일본 투수들의 집중 견제와 팀 내 주전 1루수였던 후쿠우라 가즈야와의 경쟁, 문화적인 차이 등 생소한 환경 속에서 타율 0.240, 14홈런, 50타점에 그쳤다. 이승엽은 2005년 지바 롯데 순회 코치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현 한화)과 명예 회복을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다. 훈련 성과는 결과로 드러났다. 그는 2005년 타율 0.260, 30홈런, 82타점을 기록했고 일본 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다.

시즌 종료 후 이승엽은 기대와 우려 속에 일본 프로야구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계약 기간은 단 1년이었다. 그는 요미우리 이적 첫해 타율 0.323, 41홈런을 때려내며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일본 최고 명문팀 4번 타자로서 맹활약을 펼치는 모습은 국내 야구팬들에게 적잖은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이승엽은 시즌 종료 후 4년간 30억 엔이라는 초대형 재계약을 맺었다. 이승엽의 연봉은 약 6억5000만 엔으로 당시 리그 전체 1위였고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2위의 기록이었다.

성공과 실패, 두 가지 열매 맛본 일본 무대

하지만 이후 이승엽은 고난의 길을 걸었다. 선구안 문제와 종회전 변화구에 대한 약점을 노출하면서 하향세를 탔고 2008년엔 타율 0.248, 8홈런의 초라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2009년 제2회 WBC 대회 불참을 선언하면서 시즌 성적에 집중하겠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부진은 계속됐고 2군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요미우리에서 방출된 후 오릭스에서 1년간 뛴 다음 국내 복귀를 결정했다.

최고의 자리와 제일 낮은 자리를 오간 이승엽. 그는 일본에서 보낸 8년의 기억을 좋게 남기고 싶어 한다. 이승엽은 “일본에서 방황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많았던 게 마흔이 돼서도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그 세월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치로 판단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이승엽은 2012년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와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 타율 0.307,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하며 부문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2013년에는 13개 홈런을 기록해 주춤했지만, 지난해 127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8,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해 복귀 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그는 지난해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의 영광을 안으며 9번째 황금장갑을 꼈다. 역대 최다 기록이다.

이승엽의 홈런 기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1995년부터 2003년까지 324개를 쳤고, 국내로 돌아온 2012시즌부터 76홈런을 기록 중이다. 일본에서는 8시즌 동안 159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한·일 홈런 기록을 더하면 559개에 달한다. ML에서 이승엽보다 많은 홈런을 친 타자는 13명뿐이며 일본에서는 단 3명에 그친다.

이승엽이 대외적으로 찬사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비단 홈런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기록을 숱하게 작성하면서 인터뷰를 할 때마다 ‘팀의 일원일 뿐’이라며 자세를 낮췄고, 이런 모습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됐다. 삼성 대선배인 이만수 전 감독은 “승엽이의 겸손한 태도는 모든 선수가 본받아야 할 자세”라고 강조했다. 이승엽은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400홈런 고지를 밟은 그는 “이제 450홈런을 향해 달려가겠다. 그리고 이젠 100점 아빠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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