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42. 미인계로 정권 잡은 후 보복과 살육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6.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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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노론과 남인, 죽고 죽이는 공작정치 벌여

공작(工作·Operational)이란 정보기관이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적으로 수행하는 비밀 활동을 뜻한다. 정보기관이 정치에 파고들어 하는 일이 ‘공작정치’다. 공작정치의 특징은 주로 정권을 장악한 쪽에서 정권 유지나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각종 공작을 수행하는 것이다. 군부독재 정권은 사실 공작정치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작정치는 한국 현대사에 큰 어둠을 드리웠다. 그러나 공작정치가 비단 군부독재 정권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행해졌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종 14년(1519년)조에 따르면, 훈구 계열의 남곤 등이 대궐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주초(走肖)’는 조(趙)를 뜻하니 조광조가 임금이 된다는 뜻이다. 이런 정치 공작에 걸린 조광조는 끝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숙종이 직접 국문을 행하고 있는 MBC 드라마 의 한 장면. ⓒ MBC 제공

노론, 남인 세력 제거 위해 ‘임술고변’ 기획

조선 후기 인조반정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노론)이 야당이었던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것도 공작정치였다. 그런데 남인은 당초 서인이 정권으로 끌어들인 세력이었다.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은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냈지만, 사대부를 비롯한 민심은 싸늘했다. 여기저기서 쿠데타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자 다급해진 서인은 남인 영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민심을 수습했던 것이다. 이렇게 남인은 일종의 관제 야당으로 인조반정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반정 초에 공신들이 모여 두 가지 비밀스러운 약속을 했다. 첫째는 국혼(國婚)을 잃지 말자는 것이고, 둘째는 산림(山林)을 높여 임용하자는 것이었다. 국혼을 잃지 말자는 뜻은 세자빈을 서인가(家)에서 독점하자는 말이다. 즉 차기 국왕을 장악하겠다는 뜻이었다. 산림을 높이자는 말은 재야의 유학자들을 높여서 반정 정권의 명분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반정 일등공신 김류가 “이조참판 이하는 (남인을) 쓸 수 있지만 이조판서 이상 및 의정부에는 남인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처럼 서인은 남인을 끌어들이기는 했어도 관제 야당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인이 예송논쟁을 계기로 정권에 도전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효종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1차 예송논쟁(효종 10년, 1659년)에서는 서인이 승리했지만, 15년 후인 2차 예송논쟁(현종 15년, 1674년)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숙종 초년에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숙종 6년(1680년) 서인은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축출하고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다시는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목표로 정치공작에 나서면서 조선 정치사에 큰 파장이 일어난 것이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지 2년 6개월 후인 숙종 8년(1682년) 10월. 전 병사(兵使) 김환과 무과급제자 출신 이회, 군영의 장교인 기패관(旗牌官) 한수만 등이 역모를 고변했다. 남인 허새·허영 등이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대왕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시키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주초위왕’이 조광조를 과녁으로 삼았다면 이번의 고변은 복평군을 과녁으로 삼은 것이었다.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형제는 당시 ‘삼복(三福)’으로 불렸는데, 서인보다 남인과 가까웠기 때문에 서인의 제거 과녁이 된 것이다. 경신환국 직후 남인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이 사형당한 이유도 복선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이 역시 서인의 정치공작이었는데,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이 세간에 자자한 가운데 2년 후 또다시 남인이 복평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고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고변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비슷한 고변이 잇따랐다. 이것이 모두 숙종 8년(1682년 임술년)에 발생했으므로 ‘임술고변’이라고 불리는데 그 내막은 복잡하지만 목적은 모두 남인을 도륙하기 위한 것이었다.

협박당한 자는 죽고, 협박한 자는 죄 면해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정치공작에는 기획 총책이 있게 마련이다. 임술고변의 총책은 우의정 김석주였다. 김석주의 부친 김좌명은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의 큰아버지였으므로 김석주도 국왕의 외척이었다. 김석주는 대동법의 경세가 김육의 손자였다. 효종·현종 연간에 서인이 대동법을 둘러싸고 대동법에 찬성하는 김육 중심의 한당(漢黨)과 이에 반대하는 김집·송시열 중심의 산당(山黨)으로 갈릴 때 김석주는 조부와 부친을 따라 한당이 되었다. 사실 남인이 제2차 예송논쟁 와중에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산당에 원한을 가진 김석주가 남인 편을 들어서 숙종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남인의 세가 커지자 오히려 그는 남인을 제거하는 경신환국을 일으켰고, 나아가 남인의 씨를 말리기 위해 임술고변을 기획했던 것이다.

이건창의 <당의통략>과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의 <한수재집(寒水齋集)> 등에는 김석주가 주도한 임술고변의 실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김석주가 고변자 김환에게 공작금을 주면서 서울 용산에 사는 남인 허새·허영의 옆집으로 이사하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허새·허영과 가깝게 사귄 후 서로 장기를 두면서 김환이 이기면 “나라도 이렇게 취해야 한다”라고 떠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허새·허영이 동조하면 바로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환은 “그들이 도리어 나를 고변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거절했다. 김석주는 “그것은 모두 내 손에 달린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는 한편 “명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작이 마무리되기 전에 김석주가 사신으로 북경에 가게 되면서 심복인 어영대장 김익훈에게 이 일을 대신 맡겼다. 기획 총책이 국내를 비운 사이에 김환은 허새·허영을 유인했지만 두 사람은 ‘옆집에 이사 온 김환이 역모를 꾸미는 것 같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허새·허영이 자신을 먼저 고변할지 모른다고 우려한 김환이 선수 치듯이 고변한 것이었다. 그러자 공을 탐낸 여러 명이 뒤따라 고변에 가세했다.

허새·허영은 서인이 포진한 국청(鞫廳)에 끌려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허새는 압슬형(壓膝刑)을 포함한 혹독한 형신 끝에 역모를 시인했고, 허영도 고문에 못 이겨 혐의를 시인했다. 김석주가 기획한 정치공작은 성공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변수가 발생했다. <숙종실록>에서 “허새가 죄를 승복한 뒤에도 모주(謀主·일을 주장하여 꾀하는 사람)에 대한 항목만은 끝내 하나로 귀일되지 않아 연달아 일곱 차례의 형신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모주가 복창군이라는 사실만은 끝내 부인했다. 그래서 허새·허영은 사형시킬 수 있었지만 복창군 제거 계획은 실패한 절반의 성공이었다. 어영대장 김익훈은 전익대를 시켜 전 경주부윤 유명견을 또 역모로 몰았는데, 이 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허새·허영을 고변했던 김환·이회·한수만은 공신이 되었지만 유명견을 물고 들어갔던 전익대는 거꾸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정치공작이란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를 두고 서인이 둘로 갈라졌다. 서인 중에서도 젊은 서인은 자당의 원로들이 주도한 정치공작에 강하게 반대했다. 김육과 함께 대동법에 찬성했던 조익의 손자인 승지 조지겸과 집의 한태동 등 젊은 서인이 재수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당의통략>은 “이때 사류(士類)들이 다투어 ‘김익훈이 남을 유인해 역모로 만들었으니 그 마음은 자신이 역적이 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당시 젊은 서인들은 당익(黨益)을 뛰어넘는 원칙과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서인들의 재수사 요구로 귀양 간 전익대를 불러 다시 심문했는데, 김환이 사주했다고 고백했다. 김환을 국문해야 했지만 이 경우 사주한 김익훈과 김석주의 실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김환은 국문 없이 귀양 보내고 전익대는 사형시키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주범은 귀양 가고 종범은 사형당한 셈이었다. 그래서 조지겸은 “협박을 당한 전익대는 죽었는데, 유혹하고 협박한 자(김환) 홀로 죄를 면하겠습니까?”(<숙종실록> 9년 4월16일)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당의통략>이 “모두 김석주와 김익훈이 사주한 것인데, 전익대만 후원자가 없었으므로 혼자 죽었다고 사람들이 일렀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정치공작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다. 이 사건은 서인을 분당시켰다. 정치공작에 찬성하는 서인 원로 중심의 노론(老論)과 반대하는 젊은 서인 중심의 소론(少論)으로 갈린 것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월9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날 원 전 원장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 EPA 연합

공작정치 일상화, 정상적 정치 체제 다 삼켜

이 사건 이후 노론과 남인은 서로를 국정 파트너가 아닌 적당(賊黨)으로 여겼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사대부들은 정치공작에 물들었다. 원한을 가진 남인은 희빈 장씨라는 미인계를 이용해 정권을 잡은 후(기사환국) 임술고변을 무고로 판정 짓고, 김익훈 등을 사형시켰다. 그 후 서인은 다시 숙빈 최씨라는 미인계를 사용해 정권을 잡은 다음(갑술환국) 여러 남인을 사형시켜 보복했다. 정권 교체가 곧 살육으로 이어지니 공작정치가 일상화되면서 정상적인 정치 체제를 다 삼켜버렸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라져가던 과거 군부독재 정권 시대 공작정치의 음습한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큰 불행이다. 국가 기밀인 남북정상회담 관련 회의록이 대선용으로 흘러다니는가 하면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법정 구속되었고, 역시 대선 불법 개입으로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심리전 단장도 법정 구속됐다. 그간 숱한 희생 끝에 겨우 정상 궤도로 향하던 정치 체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반(反)국가·반(反)문명적 범죄 행위다. 정치공작은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 세력을 양산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해치게 되어 있다. 정치공작이란 후진적 정치 행태를 근절시키고 문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치 시스템으로 복원시킬 의무는 집권 세력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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