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안에 갇혔어도 ‘큰 호랑이’ 역시 세군
  • 모종혁 중국 통신원 ()
  • 승인 2015.06.24 09:0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형 면한 저우융캉, 시진핑의 ‘부패와의 전쟁’ 한계 드러내

6월11일 밤,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이례적인 논평을 발표했다. 사설과 다름없는 논평에서 “당 기율 앞에는 특수당원이 없고 국법 앞에는 특수한 인민이 없다”며 “권력이 크든 작든, 직위가 높든 낮든, 그 누구도 철모자왕(鐵帽子王)이 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철모자왕은 청나라 때 존재했던 세습 귀족을 일컫는다. 최근 들어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전·현직 고위 관료를 비판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인민일보가 지목한 철모자왕은 5월22일 톈진(天津) 시 제1중급인민법원에서 열린 비공개 결심 공판에서 단죄된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를 가리킨다. 법원은 저우의 세 가지 중대 범죄 혐의 중 뇌물수수죄에 대해 무기징역을, 직권남용죄와 국가 기밀 고의누설죄는 각각 징역 7년형과 4년형을 판결했다. 이에 따라 무기징역과 정치 권리의 종신 박탈, 개인 재산 몰수를 선고했다. 판결이 내려진 후 저우융캉은 “법원의 판결에 복종한다”며 항소하지 않았다. 중국은 2심제지만, 저우가 상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신화통신은 이 사실을 6월11일에야 보도했다. 

2012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당 창립 90주년 기념대회에서 인사하고 있는 저우융캉. 지난 5월22일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은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AP 연합

판결문, 저우융캉 부패 ‘빙산의 일각’만 제시

개혁·개방 이래 최악의 정치 스캔들이라는 저우융캉 사건은 이렇게 조용히 끝났다. 그동안 중화권 매체가 쏟아놓은 보도에 따르면, 저우 일가가 긁어모은 검은돈은 900억 위안(약 16조2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번 재판에서 공개된 직·간접적인 수뢰액은 1억2977만 위안(약 233억원)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쿠데타 기도, 살인 사건 연루 혐의 내용은 판결문에 없었다. 국가 기밀 고의 유출 혐의도 ‘봐서는 안 되는 측근에게 기밀 문건을 내줬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적시됐고, 저우가 당·정 조직과 지방정부, 국유기업 등에 20년 가까이 구축한 석유방(石油幇)·정법방(政法幇)·쓰촨방(四川幇) 등 복마전 같은 사조직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6월15일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석유방인 랴오융위안(廖永遠) 전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 사장에게 쌍개(雙開·당적과 공직 박탈) 처분을 내린 점을 비춰볼 때 뜻밖의 결과였다.

중국 법률은 공직자의 뇌물 수수 행위를 극형으로 다스린다. 국가 기밀 유출 행위는 중죄로 처벌한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중화권 매체는 저우에게 사형 또는 사형 집행유예가 내려질 것으로 점쳤다. 그러나 선고 형량은 예상보다 적었다. 뿐만 아니라 재판 형식, 판결 내용 등도 특이했다. 2013년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 시 당서기에 대한 재판은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로 중계됐고 뇌물 수수, 공금 횡령, 직권 남용 등 혐의에 대해 무기징역으로 처벌됐다.

저우융캉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집권한 이래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반부패 전쟁에서 가장 ‘큰 호랑이’였다. 저우와 그의 일가 부패상은 법원 판결문에서 일부 드러났다. 재판관은 “저우융캉은 직책을 이용해 우빙(吳兵), 딩쉐펑(丁雪峰), 원칭산(溫靑山), 저우하오(周灝), 장제민(蔣潔敏)의 이익을 후원하여 장제민으로부터 73만1100위안(약 1억3000만원)을 받았다”고 판시했다. 또한 “장남 저우빈(周濱)과 부인 자샤오예(賈曉燁)는 우빙, 딩쉐펑, 원칭산, 저우하오가 제공한 뇌물을 받은 뒤 저우융캉에게 사후 보고했다”고 밝혔다.

우빙은 저우의 재산 관리인이자 집사다. 딩쉐펑은 전 산시(山西)성 뤼량(呂梁) 시장으로 저우빈과 친분이 두텁다. 원칭산은 CNPC의 최고재무책임자였으며, 저우하오는 저우융캉의 조카다. 장제민은 CNPC 회장으로 일했고 장관급인 중국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주임으로 발탁됐던 석유방의 핵심 심복이다. 판결문은 “저우가 장제민과 리춘청(李春城)에게 가족·친척 및 허옌(何燕), 차오융정(曹永正) 등에게 도움을 주라고 지시해 21억3600만 위안(약 3826억원)의 불법 이득을 취했다”고 밝혔다. 리춘청은 쓰촨(四川)성 부서기를 지냈던 저우융캉의 쓰촨방 심복이다. 허옌은 저우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던 쓰촨의 미녀 기업가다. 차오융정은 이번에 처음 모습이 드러난 점쟁이로, 저우를 앞세워 막대한 이권에 개입했다. 이 같은 저우 일가의 비리에 석유방·쓰촨방의 주요 인사들이 종횡으로 개입됐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부분적인 부패의 단면만 보여준 모습이 역력했다. 당초 홍콩과 타이완 매체들은 ‘임팩트 있는 뉴스거리’를 기대했다. 저우에 대해서는 2000년 자신보다 스물여덟 살이나 어린 젊은 CCTV 앵커 자샤오예와 결혼하기 위해 조강지처 왕수화(王淑華)를 청부 살해했다는 의혹이 줄곧 제기됐다. 또 ‘백계왕(百鷄王·100명의 암탉을 거느린 왕)’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엽색 행각을 벌인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CCTV에 근무했던 예잉춘(葉迎春)·선빙(沈氷) 등 아나운서나 기자로부터 성상납을 받아온 사실이 일부 드러났고 여기에는 CCTV 부사장과 공안부 부부장을 지낸 ‘정법당’ 리둥성(李東生)이 관여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앞두고 오히려 저우가 부인에게 “부부의 인연이 다했으니 나와 이혼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라”고 절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를 보낸 사실이 공개됐다. 천하의 호색한이 돌연 애틋한 순정남으로 돌변한 것이다.

“장쩌민이 저우의 엄벌에 반대한다” 

이런 허망한 결말에 중화권 매체와 정치평론가들은 이구동성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 최고 지도부와 저우융캉 및 원로들 간에 ‘딜’이 있었다는 것이다. 홍콩 ‘빈과일보’는 “저우가 별개로 재판을 앞둔 부인과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최고위직 인사의 추문을 폭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당국과 합의했다”고 익명의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시사평론가 천제런(陳杰人)도 ‘명보(明報)’에 “판결 배후에는 정치 게임이 존재하고 게임의 일부 카드를 저우가 들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기고했다. 정치평론가 청샹(程翔)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공산당은 인민에게서 정권의 권위를 유지하기를 원했기에 저우에 대한 판결이 작게 취급되도록 했다”고 논평했다. 

이번 재판은 심리부터 판결까지 일사처리로 진행됐다. 지난해 12월 검찰에 이송됐을 때 1년 정도의 추가 조사, 그리고 치열한 공판이 예상됐지만, 반년도 안 돼 1심 판결이 나왔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과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이 같이 일했던 저우융캉에 대한 엄벌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소문이 설득력을 얻는 결과다. 배후의 정치 게임과 원로의 입김에 따라 의법치국(依法治國)의 원칙이 버려질 수 있다는 중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