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철, 군부 파벌 다툼에서 황병서에 완패”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
  • 승인 2015.06.2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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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서 총정치국장 중심의 ‘정치군인’, ‘야전군인’ 반발 진압

북한 군부의 실세로 자리했던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 숙청을 둘러싼 뒷이야기들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 4월 말 고사총에 의해 무자비하게 처형당한 배경을 짐작하게 할 모자이크 조각이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 사항에 말대꾸를 하거나 회의석상에서 졸았다는 등의 우리 정보 당국 공식 브리핑은 현영철 몰락을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더 깊은 내막이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노동당 내 정치 군부, 야전 군인과 갈등 커”

대북 정보 관계자는 “단순한 지시 불이행 등이 아니라 북한 군부 내 파벌 싸움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현영철 제거를 결심케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보는 게 맞다”고 귀띔했다. 한두 번 눈 밖에 나는 행동만으로 군부 실세 중 하나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건 난센스란 주장이다. 이 관계자는 “특히 노동당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 군부 세력과 야전 군인들 간의 갈등이 상당한 작용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미 정보 당국은 야전군 출신인 현영철이 노동당 총정치국을 주축으로 한 정치군인 세력의 전횡에 불만을 표출해온 정황을 포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과 올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이런 발언이 잦았던 게 화근이 됐다는 분석이다. 현영철이 핵심 측근들에게 “정치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야전의 군사가들을 홀대한다”며 김정은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했다는 첩보도 있다.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정계와 군부 인사들을 만나고 온 현영철이 평양 권력을 향한 외부 세계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반영한 불만을 토로했다는 얘기다. 여기에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문제가 원만하게 성사되지 못한 게 화를 불렀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 연합뉴스

현영철이 언급한 ‘정치군인들’은 황병서가 수장을 맡고 있는 노동당 총정치국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당 우위 체제인 ‘당 국가’로 간주되는 북한에서 총정치국은 군부에 대한 노동당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기관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시기 ‘군부를 모든 것에 우선시한다’는 선군정치를 펼쳤지만 ‘군에 대한 당적 통제’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한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 때 개정된 노동당 규약 49조는 ‘총정치국은 당 중앙위 부서와 같은 권능을 가지고 사업한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은 후계 체제를 염두에 두고 수정된 규약이 총정치국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대목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 현영철의 불만 표출은 이런 총정치국에 반기를 드는 꼴이 되어 재앙을 자초한 셈이 됐다는 진단이다.

현영철이 맡아온 인민무력부장은 우리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자리다. 우리의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총참모장과 함께 북한 군부를 이끄는 양대 축을 이룬다. 하지만 총정치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다. 군 고위 장성에 대한 인사나 조직개편, 동향 감시 같은 절대적 권한을 노동당 내 군부라 할 수 있는 총정치국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정부 당국자는 “현영철 처형도 결국 황병서가 이끄는 총정치국의 감시망에 걸린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번 사태를 3년 전 리영호 총참모장 숙청의 재연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집권 8개월 만인 2012년 7월 군부 내 최고 실세였던 리영호 총참모장을 전격 해임했다. 리영호는 군부의 외화벌이 사업 등 이권을 회수하려던 노동당과 충돌했다. 김정은이 군부보다는 당과 내각 쪽으로 돈줄을 내주려 하자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다. 당시 총정치국장이 최고 실세인 최룡해(현 노동당 비서)였다. 김정은은 그해 4월 최룡해를 총정치국장에 앉혀 군부에 대한 노동당의 통제를 강화한 후 석 달 만에 리영호를 거세했다.

포병 전문가인 야전 출신 리영호는 김정일이 후계자인 아들을 위해 낙점한 김정은의 군부 과외교사였다. 김정은과 나란히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맡았고,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거머쥔 리영호는 승승장구했다. 김정일 장례식 때 상주인 김정은과 함께 운구차 행렬을 맨 앞에서 이끌면서 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집권 초 구상 중 하나인 군부 돈줄 죄기에 맞섰다가 봉변을 당했다. 리영호 전격 해임을 놓고 신군부 세력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은 조치라는 해석도 나왔다. 리영호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다른 부처 업무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등 내부 갈등을 야기한 게 문제가 되자 김정은이 칼을 빼들었다는 것이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황병서 총정치국장(왼쪽), 박영식 새 인민무력부장(오른쪽 두 번째)과 함께 제2차 군단예술선전대 경연을 관람하고 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6월15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새 인민무력부장 박영식은 총정치국 출신

리영호 숙청 후 사흘 만에 그 자리에 전격 임명됐던 인물이 현영철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현영철은 당시 대장 위 계급인 차수 칭호를 받는 등 날개를 단 듯했다. 하지만 3년도 지나지 않아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북한은 현영철 숙청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무자비한 공개 처형이 외부 세계에 알려진 상황에서 이를 인정하는 건 부담스럽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후임에 대장 박영식을 기용한 게 확실시되지만 아직 관영 매체를 통해 ‘인민무력부장’으로 호칭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박영식은 총정치국 조직담당 부국장을 지냈다. 야전군 출신인 현영철과는 궤를 달리하는 정치군인이다. 총정치국에서 핵심 자리인 조직 문제를 총괄했다는 건 군부를 한눈에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또 군부에 대한 김정은의 인식이나 장악 로드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정무 감각을 갖춘 총정치국 출신을 새 인민무력부장에 앉힌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영철 처형에서 나타난 공포 정치를 통해 김정은은 권력 내부에 극도의 긴장감을 불어넣고,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는 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잦은 인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란 예상도 많다. 정부 당국자는 “단기적으로 노동당과 군부 핵심 인사들이 충성 경쟁을 벌이겠지만 이런 상황이 장기화하면 피로나 반감을 느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집권 4년 차인 김정은은 롤러코스터 식 인사를 통해 해임과 강등 조치를 되풀이해왔다. 인민무력부장의 경우도 무려 6명(김영춘·김정각·김격식·장정남·현영철·박영식)이 바뀌었다. 6개월마다 갈아치운 셈이다. 집권 17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거쳐간 사람이 단 4명이었던 김정일 시대와 비교된다. 현영철 처형으로 뒤숭숭한 북한 군부에 정무 감각을 갖춘 총정치국 출신 인민무력부장 기용이 어떤 변수가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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