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 자정이 되면 문을 열어 지친 어깨를 위로하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5.06.2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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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야로의 만화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긴 <심야식당>

바쁜 만큼 외롭고, 힘든 만큼 허기진 날들의 연속. 등과 어깨에 하루의 피로를 고스란히 매단 퇴근길이지만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기엔 못내 아쉽다. 친한 사람을 불러내자니 그와 마주 앉아 말하고 웃고 듣는 데 쏟을 에너지가 심히 부담스럽다. 따뜻한 음식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수다가 필요한데, 어디 적당한 곳이 없을까.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생각.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법한 공간. 2007년 처음 등장한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식당>은 그 소박한 판타지를 반영한 작품이다. 도쿄 번화가 뒷골목, 자정이 되면 문을 여는 작은 식당. 작가는 이곳에 일을 마치고 너덜너덜해진 샐러리맨, 예의 없는 손님 때문에 마음이 상한 스트리퍼 등을 데려다 앉히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였다. 다른 만화였다면 주인공이 되기는 어려웠을 사람들이다. 주인공이 아닌 삶을 살아가기에 더욱 특별한 이들이라는 게 아베 야로의 생각이었다.

 

영화 <심야식당>은 만화의 이 같은 정서를 고스란히 영상으로 옮겼다. 식당 주인 마스터(고바야시 가오루)는 매일 자정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식당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대부분 여러 번 가게를 찾아와준 단골들이다. 식당에서 원래 파는 것은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과 몇 종류의 술뿐이지만, 마스터는 손님이 원하는 음식이면 즉석에서 만든다. “마스터, 늘 먹던 걸로 줘요!”를 외치며 들어오는 손님들이 먹는 음식에는 그들 각자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따뜻한 음식과 부담스럽지 않은 수다

영화는 세 가지 요리를 소재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부동산 재벌의 내연녀로 살다가 순박한 마을 청년과 교제를 시작한 다마코(다카오카 사키)는 나폴리탄, 거리를 전전하던 떠돌이 소녀 미치루(다베 미카코)는 마밥,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아내를 잃은 후 심야식당의 단골이 된 아케미(기쿠치 아키코)에게 의지하는 겐조(쓰쓰이 미치타카)는 카레와 연결된다. 물론 원작의 아이콘 중 하나인 문어 비엔나와 계란말이도 수시로 등장한다. 세 가지 에피소드는 누군가 심야식당에 두고 간 의문의 유골함을 연결 고리로 삼아 부드럽게 엮인다.

2009년부터 일본에서 방영한 TV 드라마(시즌3 종영)를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이번 극장판이 더욱 반가울 듯하다. 마스터뿐 아니라 경관 코구레(오다기리 조), 40대 노총각 타다시(후와 만사쿠), 게이 바를 운영하는 중년 게이 코스즈(아야타 도시키) 등 드라마의 주역들이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자리를 옮겼다. 결혼 문제로 끊임없이 고민하며 수다를 늘어놓는 ‘오차즈케 시스터즈’는 영화 속 세 개의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감초처럼 얼굴을 비친다. 한 편에 30분이었던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심야식당의 사계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1년간 식당을 찾아온 사람들과 마스터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맛있게 무르익어간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마스터 캐릭터는 변함없는 위로를 전한다. 그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섣부른 조언을 내리지 않는다. 자신 몫으로 남겨진 유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청년을 차버린 다마코를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할 때, 마스터는 그녀에게 어떤 쓴소리도 하지 않은 채 따뜻한 나폴리탄을 내민다. 다마코에게는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소중한 음식이다.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도망쳤던 미치루를 다시 마주쳤을 때, 마스터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동전 하나를 내민다. 목욕탕에서 지친 몸을 좀 쉬고 오라는 뜻이다. 배려에 감동한 미치루는 마스터를 도와 심야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삶을 꿈꾼다. 아케미에게 의지하다 못해 스토커처럼 변한 겐조에게는 한 접시의 카레가 소울 푸드가 된다.

<심야식당>은 시기적절한 콘텐츠가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요리하고 먹는 모습이 하나의 서사가 되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다. TV 요리 프로그램은 이제 더 이상 레시피를 알려주는 교양 방송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오락적 요소를 가미한 최고의 예능이 됐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하고 생활이 각박해지면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즐거움인 ‘먹는 것’을 찾고 있다. 화려한 만찬보다 소박한 밥상, 금세 만들 수 있는 한 그릇 요리가 인기를 끄는 것도 그래서다. 요즘의 요리는 단순히 먹는 것 하나의 의미로만 그치지도 않는다. 정서적 공허함을 메워주는 기능까지 도맡고 있다. 정신없던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연예인과 유명 셰프가 ‘집밥’을 요리해 먹고 있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아이러니의 시대. 온종일 먹을 것을 만들고 필요한 재료를 기르는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힐링해야 하는 시대다.

영화 ⓒ 영화사 진진 제공

음식뿐 아니라 정서적 포만감도 안겨

영화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심야식당>에 앞서 개봉했던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1, 2편도 이 같은 사회적 흐름과 맥이 닿아 있다. 주인공 이치코(하시모토 아이)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 코모리로 귀향한 젊은 여자다. 영화는 이치코의 일상을 담는데, 여기엔 딱히 서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심야식당>처럼 다양한 사연을 엮지도 않는다. 이치코가 땅에서 기르고, 나무에서 따고, 강에서 잡아 올린 식재료들을 정성스레 요리해 음식을 만들어 먹는 과정이 거의 전부다. 식혜, 호두밥, 오리구이 등 군침 도는 메뉴와 레시피 그리고 이치코가 이것을 열심히 맛있게 먹는 장면이 차례로 등장한다. 신기한 건 특별할 것도 없이 반복되는 이 과정이 어떤 감흥을 전달한다는 점이다. 자연을 존중하고 정직하게 땀 흘려 얻은 것들로 소박하게 조리한 음식을 먹는 삶. 이 영화는 그것이 얼마나 신성하고 의미 있는 가치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트렌드를 타고 도착한 <심야식당>은 ‘먹는다’는 기본적인 즐거움 외에도 정서적인 포만감까지 안긴다는 점에서 고마운 영화다. 한 사람을 위한 요리. 그것은 곧 정성이다. 게다가 주문하는 사람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주고, 속내를 털어놓은 진심에 진득하게 귀 기울이는 마스터에게 어느 누가 위로받지 않을 수 있을까. <심야식당>은 이 시대가 그만큼 공허한, 관계가 필요한 시대라는 방증이 아닐까. 모두에게 자신만의 심야식당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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