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 딸이 인당수에 빠져야…”
  • 조철│문화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6.2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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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펴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한창 읽고 쓰는 일에만 골몰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의 삶 속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어린 딸은 잠자리에 들기 전 아버지의 굿나잇 키스를 기대하고 서재 문 앞에서 아버지를 불렀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에 몰입한 나머지 등을 돌린 채 딸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세월이 흘러 그 딸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뒤늦게나마 글로써 딸을 향해 굿나잇 키스를 보낸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82)이 일찍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의 3주기를 맞아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펴냈다. 이 책은 단순한 추모 산문집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위안과 희망의 이야기다. 천국에 있는 딸에게 보낸 ‘우편번호 없는 편지 모음’이라 부를 만한데, 귓속말로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비디오로 되감듯 선명하게 재생하고 있다. 동시에 생명과 가족의 가치가 변질되고 고령화·저출산 등이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는 오늘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시 성찰하게 함으로써 생명과 가족애라는 주제를 사회적으로, 현실적으로 재조명하게 한다.

ⓒ 시사저널 최준필

“네가 태어나던 날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

“네가 태어나던 날 나도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가 태어나는 순간 나도 아버지가 된 것이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누구의 아들이거나 누구의 남편이었다. 누구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여자는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어머니가 될 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단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아버지가 된다.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가 되는 거지.”

이 전 장관이 아버지로서 특별히 시도한 이 스토리텔링은 그의 어떤 스토리텔링보다도 절실하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딸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겪고서 진짜 아버지로 거듭난 구체적인 사건으로부터 태동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세상 아버지들은 죽을 때까지 ‘초’ 자를 떼지 못하는 초보 운전수일 수밖에 없는가 보다. 아버지들은 딸을 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딸이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 더 많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말이다. 얼마나 많은 딸들이 인당수에 빠져 목숨을 잃어야 눈먼 아버지들이 눈을 뜨게 될까. 그걸 알면 아버지들은 절대로 전쟁 같은 것, 남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 같은 것, 숲을 사막으로 만드는 환경을 파괴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 장관은 핵가족을 넘어서 싱글족들이 넘쳐나는 가족 해체의 시대에 딸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읊조림으로써 궁극적으로 생명과 죽음, 그리고 온 세상을 이끌어가는 가족의 사랑을 말한다. 아버지가 되면서 깨우친 것들을 들려주면서 공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를 가슴에 안고 내려다본 바다, 우리의 바다. 하얀 백사장과 초록빛으로 출렁이는 바다는 내가 여드름이 잔뜩 난 얼굴로 처음 보았던 그 바다보다 더 큰 파도 소리를 내며 출렁거렸지. 왜인지 아니? 널 가슴에 품고 동시에 바다를 품고 파도를 보았기 때문이야. 너의 작은 심장이 뛰는 그 생명의 소리가 파도의 진동으로 울리면서 바다 전체로 퍼져갔던 거야.”

이 전 장관은 글을 써온 60여 년 동안 독자로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이면을 이 책을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딸을 키우고 출가시켜 손자를 보면서 자신의 글쓰기에도 큰 변화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대목이다.

“손자 훈우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익지 않은 파란 열매였어.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글에는 독기가 있었지. 아마 독자들은 내 글을 읽고 설사를 하거나 역겨워서 뱉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을 거야. 시고 단맛이 나는 매실 있잖니, 그것이 청매일 때는 먹으면 독 때문에 죽는 수도 있어. 이를테면 내 글은 청매와도 같은 것이었지. 그런데 훈우를 가슴에 품고 난 다음부터는 용서하는 법, 그리고 내가 저지른 과실,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손톱자국, 이런 것들이 다 보이는 거야.”

“남들이 놀리더라도 재생과 부활의 힘 믿는다”

독자들은 처음으로 한 사람의 남편이자 자식을 둔 아버지, 나아가 할아버지인 이어령의 민낯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딸을 잃고 난 뒤에야 고통 없이는 사랑을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고 드디어 진정한 아버지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나를 참 많이 미워했단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 똑같은 방법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길에서 만난다면 어떻게 할 거냐는 설문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어. 그때 나는, 보기 좋게 뺨을 때릴 거라고 대답할 정도였지.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어. 위험한 짐승을 기르는 것처럼 위태로운 내 마음 앞에서 떨고 있었지. 그러나 나는 나의 약점까지도 사랑하게 되어버린 거야. 불완전하고 깨지기 쉬운 인간이라는 생명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방법을 조금 터득한 까닭이겠지. 이 단계를 지나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면, 자연히 남도 사랑하게 된단다.”

이 전 장관은 죽음이 결코 인간의 끝이 아니라며 위안을 던진다. 그는 오히려 죽음 뒤에 미처 하지 못한 말들과 배움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로부터 새로운 시작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지는 저녁 해는 바로 내일 떠오르는 아침노을의 그 태양 빛’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굿나잇 키스’는 새로운 아침이 온다는 희망을 품은 인사말임을 일깨운다.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어. 나는 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의 노을을 아침의 노을로 바꾸어버리는 재생과 부활의 힘을 믿는 것이라고. 남들이 다 놀리더라도, 나는 그 힘이 네가 말하는 믿음의 힘이고 희망이고 빛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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