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아베 ‘비선’이 움직인다
  • 임수택│편집위원 ()
  • 승인 2015.07.0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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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정상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식 참석 이병기 실장과 스가 장관 ‘핫라인’ 가동

주한 일본대사관에서는 한국과 일본 학생들이 우리말과 일본 말로 합창을 했다. 같은 시각, 일본의 주일 한국대사관에서는 한국 전통 악기에 맞춰 우리 가락이 울려 퍼졌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6월22일, 모처럼 한·일 양국 정상은 상대국 대사관에서 환하게 웃었다.

외교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양국 정상의 기념식 행사 교차 참석은 “한국이 먼저 제안했고, 일본이 이를 받아들였다” 정도로 정리된다. 한·일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이 바뀌었고, 과거사 문제와 외교 문제를 분리해 상황에 따라 대응하고자 하는 전략 변화가 엿보이는 셈이다. 역사 인식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극복하고 양자 간 정상회담 개최라는 결론까지 올해 안에 도달할 수 있을지 주목되는 이유다.

6월22일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 청와대 제공 같은 날 아베 총리 역시 일본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 AP연합

미국 “한·일 만남 의의가 깊다” 반색

일본 정가에 정통한 한 인사는 “제안을 던진 우리와 달리 아베 총리와 아베 정부의 주요 인물들에게서는 한껏 여유가 보인다”고 평가했다. 일본 측에서는 자신들이 좀 더 유리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아베 총리는 느긋했다.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 기본 노선이 한국 내부에서도 피로감을 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고, 자연스레 청와대의 강경 노선이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게 이 인사의 지적이다. 이런 방향이 앞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아베 정부의 기본 틀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현재 안보법제 심의 문제가 이슈다. 아베 총리는 이 일로 일본 의회에 계속 출석하고 있다. 때문에 당초 한국 측의 제안에 대한 일본 측의 첫 대답은 “너무 바빠서 어려울 것 같다”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참석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회기 중에 총리가 자리를 비우기 위해서는 국회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아베 총리는 야당 측에도 동의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정부의 입장이 갑자기 바뀌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측이 제기된다. 한·일 양국은 그동안 미국의 한·일 관계 개선 요구에 대해 부담감을 느껴왔다. 5월18일 청와대를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요구했던 것도 한·일 관계 개선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양보해주길 바란다는 뉘앙스도 내비쳤다. 오바마 행정부는 적어도 9월까지 미·중 정상회담을 통해 연내 TPP를 체결하고 미국의 대외 전략인 ‘아시아로의 회귀’에 기초한 국제 질서의 토대를 다듬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방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이 선결 조건이다. 이번 50주년 행사를 두고 존 커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그 의의가 깊다”며 재빠르게 언급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워싱턴포스트는 6월2일 “도쿄와 서울 사이에서 은밀히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식 전에 일본은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은 분위기를 전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흐름에서 박 대통령이나 아베 총리 모두 최근 관계 개선에 서로 소홀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 국내 정치가 변화한 것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6월23일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39%까지 떨어져 내각 발족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안전보장 관련 법안에 대해서는 찬성 29%, 반대 53%였다. 중의원 헌법심사회에 출석한 헌법학자 3명 모두가 집단적 안전보장에 관해 위헌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개헌 동력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베 총리는 기본적으로 아베노믹스를 통한 일본 경제의 회복을 무기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회복하려 한다. 이런 결과를 두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아베 총리가 유권자들로 하여금 계속 등을 돌리게 할 경우 경제 개혁(아베노믹스)에도 위험이 따를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총리 관저가 피해야 할 결과다. 지지율 회복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제안이 온 것이다.

모리 전 총리 등 지한파 의원들 권유

모리 요시로 전 총리,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 의원연맹 회장 등 자민당 내 지한파(知韓派) 의원들의 우려도 아베 총리의 참석을 가능케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한국과 교류하던 이들 원로 정치인은 여전히 주요 직책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2020년 도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모리 전 총리의 역할이 주목받았다. 그는 6월1일 한국을 방문해 박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아베 총리에게 50주년 행사에 참석할 것을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원래 50년 전 한·일 국교 정상화 조치 그 자체가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50년 후 역대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한·일 관계인지라 양국 정상들 대신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외교 수장들보다는 비선이 움직였을 거라는 추측이 나온다.

주목받는 연결 고리가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관계다. 이 실장은 주일대사를 지냈고 게이오 대학 객원교수를 지내는 등 일본을 잘 알며 일본어에 능통하다. 주일대사 시절에는 동일본 대지진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등 일본 측과 깊은 스킨십을 가졌다. 스가 장관과도 당시 매달 점심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이 실장이 청와대로 입성한 지난 2월, 스가 장관은 그의 취임을 축하하며 “우리는 솔직히 이야기를 터놓는 사이다”라며 각별함을 표시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친밀한 사이인 두 사람은 현재 양국 정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일종의 핫라인이 가동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장밋빛 미래만 예상되는 건 아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아베 총리의 기본 자세는 한국과의 문제 및 관계 설정의 기본 전략에서 수세적이며 반성적이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양국 정상이 서로의 기념행사에 참석해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기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일 관계 개선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그 첫 번째 시험대는 아무래도 종전 기념일인 8월15일에 있을 아베 총리의 담화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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