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친위 쿠데타…힘의 한계만 노출했다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5.07.0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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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 재집권 프로젝트’ 곳곳 암초···김무성·유승민 내성만 더 키워

“2008년 총선에서 당선되고 얼마 안 되어서 박근혜 의원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보자고 하더라. 물론 직접 전화한 게 아니고 보좌진인 듯했다. 서울 ○○백화점 앞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라 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었더니, 누군가 와서 차에서 내려 자기 차에 타라는 것이다. 마치 무슨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간 곳이 내가 잘 아는 강남의 한 유명 음식점 내실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그리로 오라고 하면 될 것을. 참, 남다른 분이구나 하는 점을 느꼈다.”

새누리당 의원을 지낸 A씨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이명박(MB) 정부 시절 한나라당에서 친박계의 수장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A씨는 당시 현역 대통령이던 MB보다 박 대통령을 만나기가 더 힘들었다고 한다. 역시 18대 새누리당 의원을 지냈던 B씨는 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몇몇 의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겪은 경험을 털어놓았다. “박 대통령은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분위기가 싸~해진다. 그러면 얼른 알아서 다른 질문으로 빨리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현재 새누리당 초선인 C 의원은 며칠 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에 의해 정치권에 영입됐고,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지난 2012년 대선 때 정말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비록 초선이지만, 이후 대통령과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다. 이번에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의 정치’ 운운하는 걸 들으면서 섬뜩함을 느꼈다. 정치 신인으로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길을 걷겠노라 다짐했지만, 이번에 결심을 했다. 앞으로 나를 친박이 아닌 비박으로 분류해도 좋다.”

7월2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의 거취와 관련해 갈등을 빚는 가운데 김태호 최고위원, 유승민 원내대표, 김무성 대표(왼쪽부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발언 너무 나갔다”

여권의 역학관계가 변하고 있다. 그동안 막연히 추정되던 수적 비교가 최근 ‘비박’의 확연한 우세로 드러나고 있다('비박>친박, 권력의 추는 기울었다' 기사 보기).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씨를 댕긴 것은 친박과 청와대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친박의 패착으로 보인다. 친박의 기본 전략은 박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이후 유 원내대표 사퇴를 관철시키면서 그동안 느슨해진 계파 결속력을 단단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반사 효과로 비박 쪽을 기웃대던 중도 성향 의원들을 다시 범(汎)친박으로 끌어모으자는 계산이었다. 

처음 모양새는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지난 6월 중순 이후부터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기정사실화되면서 분위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유 원내대표와 호흡을 맞추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청와대 쪽으로 완연히 기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유 원내대표가 고립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6월25일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거론하며 유 원내대표를 찍어내겠다고 강경 발언을 한 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대통령이 너무 나갔다”는 여론이 대세를 이루면서 당초 ‘사퇴 불가피’로 몰리던 유 원내대표는 ‘버티기’에 들어갔다. 여기에 친박의 막무가내 식 ‘사퇴 압박’이 오히려 당내 반감을 키웠다. 급기야 7월2일 최고위원회의는 욕설과 퇴장 등으로 파행 사태를 겪었고, 여론은 급격히 돌아섰다.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보수 언론들도 ‘여왕과 공화국의 불화’(조선일보 7월2일자), ‘배신자 만들어내는 대통령’(동아일보 7월3일자) 등의 칼럼을 통해 박 대통령과 친박의 행태를 비판했다. 새누리당 내 전략가로 통하는 한 인사는 “과거 총재가 당을 장악하던 권위주의 시절에 원내총무가 있었는데, 당시 원내총무는 총재가 직접 지명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여당도 그랬고, 그 시절 YS·DJ가 이끌었던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원내총무는 총재의 심복이자 심부름꾼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의원들이 직접 뽑는 원내대표는 힘이 막강해졌다. 대통령이 그만둬라 마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의 생각에는 아직도 원내대표가 원내총무로 비춰지고 있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이번 사태로 박 대통령은 리더십에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국가 지도자가 아닌 정파 수장의 이미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이 특정 정치인과 감정 대립을 하는 양상으로 비치면서 공적 가치가 훼손되고 향후 리더십 약화가 불가피해졌다”고 분석했다. 

결국 유 원내대표가 사퇴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도 있다. 이미 유 원내대표가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는 분석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유 원내대표가 더 버티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청와대로서는 정권의 사활을 걸고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정치 전반에 대한 사정을 몰아붙일 수 있다. 이는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 의원들도 원하지 않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실제 여의도에서는 “검찰 출신의 황교안 총리를 주목해야 한다”느니 “우병우 민정수석이 움직인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떠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의 정치’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포토

유승민 사퇴해도 친박-비박 충돌 더 심해질 것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하더라도, 향후 정국이 친박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긴 힘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친박의 최종 타깃은 김무성 대표이지, 결코 유 원내대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 대표를 낙마시키기 위해서는 친박 성향 최고위원들이 집단 사퇴하는 등 그야말로 사활을 걸어야 하는데 유 원내대표보다 훨씬 노회한 김 대표가 그런 빌미를 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친박 입장에서는 당장 차기 원내대표 경선 상황도 녹록하지 않다. 벌써부터 이주영·정우택 의원 등 친박 의원 후보군이 거론되고 있지만, 당내 경선에 들어갈 경우 비박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친박으로선 청와대를 등에 업고 경선이 아닌 ‘합의 추대’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비박이 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어서 다시 한 번 양측의 충돌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승부사 기질이 있는 김 대표로서는 친박의 ‘압박’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되면 정면으로 맞부딪칠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는 각각 20여 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김무성계’와 ‘유승민계’의 굳건한 결속력이  한 요인으로 꼽힌다. 물론 ‘친이계’도 정치적 득실만 맞아떨어지면 언제든 우군이 될 수 있다. 친박이 기대는 곳은 그나마 초·재선 그룹을 중심으로 한 중도 성향 의원들인데, 앞서 언급한 C 의원처럼 이들은 이번 ‘유승민 사태’로 친박과 더 멀어진 것으로 관측된다. 

결론적으로 거부권 정국을 계기로 박 대통령이 여론에 호소해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친박이 ‘선당후사(先黨後私)’를 내세우며 유승민 사퇴를 밀어붙인 후, 사정 정국 돌입과 함께 친박을 복원하고 김 대표 체제마저 무너뜨리는 ‘친박 재집권 전략’은 성공 가능성이 작아졌다. 윤희웅 센터장은 “그동안 비박이 친박에 비해 수적 우세를 갖고도 목소리를 못 낸 것은 구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비박은 이번에 청와대와 맞서면서 응집도가 한 단계 상향되는 효과를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와 친박이 무리하게 김 대표를 흔들면 비박의 응집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 복귀설이 나돌고 있는 최경환 부총리 ⓒ 시사저널 포토

여권 내에서 청와대ㆍ친박계의 ‘유승민 찍어내기’가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당 복귀를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와 주목된다. 이는 김무성 대표 체제 붕괴 후 새누리당 지도부를 박근혜 대통령의 친위부대로 세우려는 친박계 일각의 의중과 맞물려 있다. 지금 벌어지는 여권 내부의 갈등이 사실상 친박계의 친위 쿠데타라는 것이다. 

김 대표와 가까운 한 핵심 당직자는 “박 대통령의 유승민 원내대표 공개 비난 이후 친박계의 단체행동을 주도하는 이들이 공교롭게도 최 부총리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며 “지금 상황은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넘어 당을 청와대 직할부대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른 비박계 초선 의원도 “최 부총리가 조만간 당에 복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친박계가 최 부총리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란 얘기가 많다”고 전했다. 

실제 친박계 일각에선 최 부총리의 당 복귀 후 행보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까지 나돈다. 김 대표 체제를 무너뜨린 다음 전당대회를 다시 치르더라도 승산이 크지 않다고 판단해 아예 최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를 꾸려 총선을 준비하는 시나리오다. 친박계 입장에선 총선 공천권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고, 청와대 역시 당을 직접 지휘하며 국정을 효율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방안이다. 황교안 총리 임명으로 내각의 기수 서열이 역전된 만큼 최 부총리의 당 복귀는 시간문제이고, 이르면 메르스와 가뭄 추경안 처리가 마무리되는 7월 중하순이 될 것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이른바 ‘최경환 역할론’은 현재 당내 친박계에 마땅한 구심이 없다는 데 근거한다. 좌장 격인 서청원 최고위원은 70세가 넘은 고령이고, 재선인 윤상현ㆍ김재원 의원 등은 리더보다는 실무형에 가깝다.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이정현 최고위원도 사실상 단독 플레이어다. 현재의 당내 진용으로는 정치적 무게감에서 김 대표나 유 원내대표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한 수도권 비박계 의원은 이 같은 친박계 내부 기류를 ‘재집권 프로젝트’라고 부르면서도 “현실적으로 대선보다는 총선이 목표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친박계 친위부대를 당의 전면에 내세워 총선과 대선을 치르겠다는 구상이 담긴 움직임이지만, 대선의 경우 ‘간판 인물’이 없어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친박계 재집권 프로젝트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포스트 박근혜’로 인정받을 만한 ‘미래 권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 부총리만 해도 아직은 대권 주자로 보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해 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대망론’이 친박계 의원 모임에서 처음 공론화되고, 최근 비박계로 분류되던 김태호 최고위원이 유 원내대표 몰아내기에 앞장서는 걸 두고 ‘친박 주자’를 노린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박 대통령과의 관계를 감안할 때 가능성은 작다는 시각이 다수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차라리 친박계가 능력도 출중하고 인물도 번듯하면 그냥 맡겨라도 보겠다”며 “이도 저도 아니면서 이토록 당을 흔드는 건 결국 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는다는 이유로 당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양정대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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