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표범 되고 싶은 사나이
  • 윤영무│MBC아카데미 이사 ()
  • 승인 2015.07.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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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에 아프리카 문화원 연 태천만씨

 

9년 전,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에 1만여 평의 아프리카 문화원을 개장했던 태천만씨(62).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였던 그가 목수로 시작해 일궈놓은 건설업체 등 5개 사업체를 정리하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아프리카 문화 사업을 개척했다.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200억원을 투자했다.

필자는 최근 그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 문화원이 아닌, 서울 강북구 우이동 ‘아트 아프리카 카페’로 갔다. 60대 초반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팔뚝과 가슴이 뽀빠이처럼 울퉁불퉁했다. 강건한 근육으로 인해 티셔츠가 터질 것 같았고, 외부 활동 때문인지 얼굴이 잔뜩 그을려 있었다. 아프리카산 수입 커피를 마시며 그와 마주 앉았다. 돌과 나무로 사람 형상을 길쭉하게 조각한 수백 점의 아프리카 골동품과 예술품들이 카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천만 아트 아프리카 카페 대표가 7월2일 아프리카 예술품을 모으게 된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평생 일군 사업체 정리해 200억원 마련

“이렇게 많은 아프리카 조각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뭐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사업을 해서 돈을 벌었으니, 이제 고향을 위해 좋은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러고 보니 10년 전 일이네요. 처음에는 제 고향에다 세계적인 유치원이나 목수학교를 만들려고 했는데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서울에 갔다가,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 물건을 파는 것을 보고, 아프리카에 대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흑인이나 노예, 전염병, 기아, 전쟁 등 어두운 측면만 부각되던 아프리카에도 이런 예술품과 조각품들이 있구나’ 하는 경이로움이었지요. 그때까지 아프리카에 대해 아는 거라곤 없었어요. 이후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문화원을 만들어 아프리카 전문가가 되어보자는 꿈을 꿨어요. 초등학교 졸업이란 제 학력 콤플렉스도 작용을 했겠죠. 그래서 아프리카의 예술품과 조각품 등을 사 모으다 보니 1000점 이상이 되었지요.”

“이 모두를 아프리카에서 수입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10년 전 제가 직접 아프리카로 가서 사온 것들입니다. 2003년 아프리카로 무작정 떠나 3년 동안 아프리카 30개국, 150개 부족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발품을 팔았습니다. 손짓·발짓으로 그들과 흥정해가며, 달러를 주고 샀습니다. 이런 문화예술품을 바탕으로 2006년에 200억원을 들여 아프리카 문화원을 개장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물건 값만 70억원을 썼으니 요즘 가치로 150억원어치를 물건 사는 데 쓴 셈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물건을 사면서 겪었던 일화를 필자에게 들려줬다.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우리나라 도자기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아프리카의 유물을 사려 하다니, 자신이 보기에도 영락없는 얼치기였다. 아프리카 골동품 상인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현지 법을 몰라 세관으로부터 압류 당한 게 수도 없었다. ‘이 줄에서부터 저기까지 있는 물건’을 몽땅 사버리는 싹쓸이식 구매도 했다. 2~3년 동안 물건을 사면서 다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아프리카 나라별로 민속품이나 조각품, 예술품, 골동품 등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생겼다. 아프리카 물건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할 수 있게 됐다. ‘이건 이 나라 것이 아니야’라든가, ‘이건 가치가 없어’라고 현지 골동품 상인에게 감정(鑑定)까지 해주게 됐다. 문제는 매번 3만 달러의 현찰을 들고 다니는 그를 무장 강도나 도둑들이 노리니, 치안 부재의 아프리카에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됐다는 점이다. 한번은 무장 괴한들에게 쫓기다 택시를 타고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는데 요즘도 꿈에 나타난다고 했다. “포천에 있는 아프리카 문화원은 잘됩니까?” 필자의 당연한 질문에 그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3년 전에 팔았어요. 개인 사정으로 어떤 대학교에 100억원에 훨씬 못 미치는 돈을 받고서요. 그 돈으로 리틀 아프리카 빌리지(Little Africa Village)를 만들려고 인수봉 인근에 2000평을 구입했지요. 인수봉이 마치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산같이 보였어요. 지금 이 카페 건물을 포함해 4개의 건물을 짓는 데 얼추 30억원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구청에서 이곳에다 공원을 만든다고 해서 제 땅의 절반을 팔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다른 땅을 찾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태천만씨처럼 50대 중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새로운 일에 ‘올인’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말년을 편안히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 굳이 ‘리틀 아프리카 빌리지’ 사업에 다시 나서면서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자식들에게 유산 포기하라고 일찌감치 말해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제일 많이 하는 후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이 ‘아~ 그때 내가 그것을 했어야 하는데’라는 것입니다. 돈을 벌었으면 값진 일에 써서 자기가 산 흔적을 남겨야지요. 죽으면 입에 동전 한 닢 물고 떠납니다. 유산을 물려준다고요? 그 순간 집안싸움이 일어날 겁니다. 저는 일찌감치 자식들에게 유산을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아프리카는 저의 꿈입니다.”

바위의 흰색 빛을 반사하는 인수봉을 바라보는데 필자의 귀에 조용필이 노래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들려오고 있었다.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면,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그에겐 포기란 없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그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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