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공포
  • 윤길주 편집국장 ()
  • 승인 2015.07.2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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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11일 부산 초원복국집.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이곳에 그 지역 기관장 7인이 속속 들어옵니다.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을 비롯해 부산을 대표하는 거물들입니다. 이들은 2층 방에 모여 작당을 합니다. 그 유명한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들의 비밀 회동은 통일국민당 관계자가 도청해 폭로했습니다. 당시 필자는 초년병 기자로 부산에 묵으면서 이 사건을 취재했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한편에서는 전직 안기부 직원을 동원해 도청하고, 다른 한쪽에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더러운 싸움 현장을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미림팀’은 안기부(국정원 전신)가 운영하던 비밀 도청팀입니다. 이 팀은 반정부 인사, 기업인 등에 대해 광범위한 도청 활동을 했습니다. 고급 한정식집, 룸살롱, 호텔 음식점 종업원을 포섭해 도청에 써먹었습니다. 사찰 대상이 5000명에 달해 ‘혹시나’ 해서 밤잠을 못 이룬 인사가 많았습니다. 당시 높은 사람과 식당에 가면 도청을 의심해 식탁 밑을 더듬어보거나 식탁 위 벨을 이리저리 살펴보곤 했던 씁쓸한 추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선전화나 휴대전화가 갑자기 끊기거나 잡소리가 나면 괜히 찜찜했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도 민간인 사찰 파동이 있었습니다. 국무총리실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동영상을 올린 민간인의 이메일·전화 등을 불법으로 엿본 겁니다. 국회에서 조사를 한다고 난리쳤지만 불법 사찰의 몸통은 밝혀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정보기관의 도·감청 유혹은 더욱 강해진 것 같습니다. 장비는 현대화되고, 그 범위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할 만큼 넓어졌습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실시간 도·감청할 수 있는 해킹 프로그램 리모트컨트롤 시스템(RCS)을 해외에서 구입한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면서 대공 수사와 대북 해외 정보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 국민 중 몇이나 믿을지 의문입니다. 국정원이 해킹을 의뢰한 것은 국내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과 3700만명이 가입한 카카오톡 애플리케이션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국민이 사찰당한 것은 아닌지 불안에 떠는 이유입니다. 해킹 프로그램을 대선과 총선 때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의혹도 커지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는 빅브라더가 등장합니다. 소설에서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합니다. 빅브라더는 상상 속 악마가 아닙니다. 현실 세계에 왕림해 시민의 사생활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서로를 의심합니다. 사람들은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공권력의 심리적 지배를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권력의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기력증 사회가 되고 맙니다.

 국회는 국정원이 해킹 프로그램을 어디에 어떻게 이용했는지 철저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불법 민간인 사찰에 쓰지 못하도록 통제 장치도 마련해야 합니다. ‘대공 수사용’이라는 방어막에 막혀 언제나처럼 어물쩍 넘어가선 안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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